90년대를 풍미했던 PC통신의 아이콘들

 

 

[컴퓨터월드] 아직도 대한민국 3대 PC통신으로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쉽게 즐길 수 있어서 90년대를 풍미했던 커뮤니티의 상징이었다. 당시 주로 사용했던 범용 에뮬레이터로는 이야기나 새롬데이터맨 등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파란 배경과 하얀 글자로 이루어진 특유의 화면을 보여줬다. 실제 PC통신 하면 아직도 이러한 화면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014XY 번호 중에 접속하고 싶은 서비스 번호를 입력하면 모뎀 연결음이 흘러나왔다. 꽤 요란했던 그 소음마저 이젠 추억으로 남아 있다. 천리안, 하이텔, 나우누리 등에서는 전용 에뮬레이터를 제공하기도 해 이미지는 물론 인터넷까지 접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제는 먼 과거 얘기가 된 PC통신을 추억해본다.


사설 BBS, 소통을 원하다
시간을 거꾸로 되돌려보면 PC통신은 BBS(Bulletin Board System, 게시판)의 영향으로 시작됐고, BBS는 인터넷이 시발점이 됐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BBS가 가지고 있는 기술을 어떤 관점을 가지고 활용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변화였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커뮤니티 형성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으며, 기술의 점진적인 발전과 동시에 새로운 소통 패러다임을 발산한 근원이 됐다.

초기 인터넷은 커뮤니티의 용도가 아닌 국방 및 연구기관의 네트워크로 활용할 생각으로 개발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좀 더 나은’ 소통을 위한 고민을 했고, 이는 퍼스널 컴퓨터의 보급으로 네트워크를 이해하고 응용할 줄 아는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그 이상 실현을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서버 비용을 조달했고, 사설 BBS를 구축했으며, PC통신의 커뮤니티 발전에 토대를 마련하게 된다. 결국 네트워크 기술과 대중들의 욕망으로 커뮤니티 창을 활짝 열었고, 그로 인해 탄생한 BBS는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 개인이 운영하는 사설BBS에 접속하려면 모뎀과 접속할 전화번호가 필요했다. 운영하지 않을 때 접속하면 모뎀 스피커에서 “여보세요?”가 들리기도 했다.


사설 BBS로 커뮤니티를 시작한 시초는 1988년 3월 이주희가 개설한 ‘the FIRST’ 였다. 같은 해 5월에 바이트전자가 개설하고 최승철이 운영한 ‘바이트 네트(Byte-Net)’가 이어졌다. 이후 대구의 ‘달구벌’은 접속노드를 4개까지 늘려 다중접속자 시스템을 지원해 관심을 끌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 개설된 ‘엠팔(EMPal) BBS’와 1991년 개설한 최오길의 ‘호롱불’은 전국적인 사설 BBS로 커뮤니티 기본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BBS 역시 엄밀히 따지면 조그마한 PC통신과 다를 바 없었다. 다만 목적에는 차이가 있었다. BBS는 개인이나 단체 등 소규모 인원을 대상으로 자체적으로 운영됐다.

사람들은 사설 BBS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기존 소통의 통념에서 더욱 발전된 새로운 관점의 소통방식으로 최초로 인터넷 커뮤니티의 본질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사설 BBS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지를 암시하고 있었다. 사설 BBS는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업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설 BBS는 기술적으로나 인프라 수준에서 개선해야 할 부분이 많았다. 사설 BBS는 개인이 구축하고 운영했기 때문에 접속인원이나, 통신 속도에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BBS 사업 가능성을 내다본 투자자들과 국내외의 관련 전문가들은 BBS의 형태와 커뮤니티 패턴을 응용한 대형 PC통신 사업에 뛰어들기 시작하기에 이른다.


케텔, PC통신으로 첫 등장하다
사실 PC통신의 가장 큰 매력은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며 생각과 정보를 공유하는 동호회 활동이었다. 3대 PC통신이라고 불리는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는 각자 서비스하는 콘텐츠가 있었지만 동호회를 통해 더욱 활성화됐다. 각 PC통신의 동호회는 고유의 문화를 형성하면서 이용자들을 만족시켰고, 소위 커뮤니티 문화라고 부르는 개념이 이때 나타났다.

사설 BBS의 물리적 공간 한계를 넘어선 PC통신은 서비스 업체에서 제공하는 전용 단말기를 통해서 접속할 수 있었다. tvN에서 방영된 ‘응답하라 1994’에서 하이텔 전용단말기를 활용해 PC통신에 접속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모뎀이란 통신장치를 통해 접속했다. 이용자는 014XY 번호 중에 접속하고 싶은 번호를 치면 관련 서비스에 접속할 수 있었고, 해당 번호를 운영하는 서비스 공급자들의 자료를 이용하거나 이용자끼리 서로 정보나 친분을 나눌 수 있었다. 당시 PC통신을 즐겼던 사람들은 모뎀이 들려줬던 요란한 소리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 국내 최초의 PC통신인 케텔(Ketel)은 수익성이 없어서 오래가지 못했다.

초기 PC통신은 윈도가 등장하기 전 도스(DOS)시대 처럼 텍스트 입력방식으로 몇 가지의 단축키를 활용하면 더 빠르게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소수의 대형 PC통신 업체들은 자체 전용 에뮬레이터를 제공하기도 해 이미지 콘텐츠도 즐길 수 있었다. PC통신은 현재의 웹 브라우저가 대중화되기 전까지 대표적 커뮤니티 수단으로 존재했다.

한국경제신문은 하이텔의 전신인 케텔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뉴스 위주의 서비스를 공급하는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 뒤로 PC통신의 상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게시판, 채팅, 동호회 등을 갖춘 서비스로 발전했다. 무료로 서비스됐던 케텔은 이용자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수익성이 없어 1990년에 들어 매각됐다. 이를 인수한 회사는 한국PC통신이었다. 이후 케텔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코텔(KORTEL)이라는 이름으로 재탄생됐지만 같은 해 7월 우리에게 익숙한 하이텔이라는 이름으로 또다시 변경돼 서비스가 시작됐다.
 

하이텔, 상용 PC통신으로 전환하다
하이텔은 1992년 7월 유료로 전환했다. 사용요금은 월 9,900원. 기존 무료 정책에 익숙해진 일부 시민들이 유료화에 반대하기도 했지만 큰 힘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 무상 보급됐던 하이텔 단말기. PC통신을 추억하는 사람이 많아 경매 사이트에 가면 지금도 심심치 않게 거래되고 있다.


하이텔은 90년대 중반부터 인기가 폭발했다. 한국통신은 이를 활용해 01410 접속만 가능한 전용 단말기를 무상으로 대여해주기도 했다. 이 단말기를 활용할 경우 속도가 14.4kbps에 불과해 채팅이나 정보 검색만 가능하고 대용량의 파일은 다운로할 수 없었다. 한국통신은 이 단말기를 대여하고 제대로 회수하지 않아 현재까지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하이텔에 접속하려면 ATDT 명령어를 입력하고 01410(14.4kbps 모뎀용), 01411(28kbps 모뎀용), 01412 or 01432 (56kbps 모뎀용) 등을 입력하면 접속할 수 있었다. 각각 접속 가능한 모뎀 속도가 달랐다. 서비스의 질에 차이가 있었던 것.

하이텔의 유명한 동호회로는 ‘개오동(케텔 오락 동호회)’을 들 수 있다. 게임 제작 동호회로 프로게이머로 유명했던 김대기, 김동준 선수가 이 곳에서 활동했다.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심도있게 다룬 동호회로 유명했다. 이 밖에 일본 애니메이션을 다룬 ‘애니메이트’도 있었다.

하이텔에는 유명한 판타지소설들이 연재되기도 했다. 드래곤 라자, 퇴마록, 데프콘 등 작가 중심의 커뮤니티가 형성되기도 했다. 양대산맥으로 당시 나우누리의 과학소설 분야 커뮤니티가 크게 활성화됐었다. 하이텔 출신으로 인지도가 높았던 브랜드(이름, 제품 등)는 김유식, 안철수, 이영도, 김경진, 이우혁, 델리스파이스, 듀나, PC Tool 등이 있었다.

하이텔은 2004년 메가패스, 한미르와 합쳐져 파란닷컴으로 다시 태어났다. 파란닷컴은 2012년 6월 문을 닫으면서 하이텔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 천리안 VT 화면. 하이텔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다양한 서비스로 100만 명 이상의 많은 이용자들이 몰려 대한민국 PC통신의 전성기를 알렸다.


천리안, 100만 명 돌파로 PC통신을 주도하다
천리안은 데이콤(현 LG유플러스의 인터넷 사업분야 전신)에서 서비스한 VT 기반 PC통신 서비스다. 1985년 10월 ‘생활정보 DB’를 구축한 후 시범 서비스에 들어갔으며 다음 해 9월에 본격적인 서비스가 시작됐다.  1989년부터는 천리안 사용자를 위해 단말기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1991년 8월에는 뉴스, 날씨, 경제, 기술, 사회, 건강, 쇼핑, 문화 등 매우 다양한 분야의 정보 서비스에 들어갔다.

1994년 1월 ‘월간 천리안’ 가족 잡지가 창간됐고 같은 해 인터넷을 연결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했지만, 본격적인 WWW(World Wide Web) 서비스를 시작하게 된 건 1995년 4월이었다. 1994년 10월에는 유료 이용자가 20만 명을 돌파했고 미국, 일본, 호주, 캐나다 등 여러 국가의 교포들을 대상으로 서비스를 하기도 했다.
 

 

▲ 컴퓨터월드에 실린 천리안 매직콜 광고


9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서 천리안은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1997년 12월에는 가입자 수가 100만 명을 돌파하면서 대한민국 대표 PC통신 서비스로 자리를 잡았다. 천리안이 WWW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대중들은 인터넷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이후 웹브라우저 프로그램인 ‘천리안98’, ‘천리안2000’을 CD에 담아 무료로 보급하면서 인터넷 시대에 대비하기도 했다. 다른 PC통신 업체가 그랬듯, 천리안도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자리를 내주게 되면서 힘을 잃게 된다.

인터넷 포털이 무료로 서비스하면서 이용자들을 흡수했고, 이러한 현상을 막을 정도로 차별화된 서비스를 내세우지 못했던 PC통신은 경쟁력을 잃게 됐다. ADSL(Asymmetric Digital Subscriber Line)을 지원하는 초고속인터넷이 보급되면서 PC통신은 상황이 더욱 안좋아졌다.
 

▲ 1995년 5월, 본지 자매지인 컴퓨터타임즈는 천리안을 통해 전자신문 서비스를 개시했다.


천리안은 인터넷 포털과 경쟁하기 위해 미국 웹 솔루션 업체인 ‘잉크토미’로부터 검색 결과를 도입하기도 했고, ‘하나로통신’과 서비스 제휴로 점유율을 지키려 노력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천리안에서 유명한 동호회는 ‘네모동(네트워크 & 모뎀플레이)’이 있었다. 주로 멀티플레이 게임과 관련된 주제를 다뤘으며, 모뎀플레이를 즐기기 위한 모임이 활성화 됐었다. 시뮬레이션 동호회도 활발했으며 비행 시뮬레이션 전문 모임도 눈길을 끌었다. 특히 이곳에는 정품 고전게임이 많이 올라와서 인기가 많았다. 이밖에 프로게이머 팀인 ‘페가수스’를 운영했고 국내 힙합 뮤지션들을 모아 ‘1999 대한민국’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나우누리, 젊은 청춘을 비추다
나우누리는 나우콤(현 아프리카TV)에서 1994년 10월 서비스를 개시했다. 1994년 3월 북네트(Book-Net)라는 이름의 책 전문 정보 서비스로 시작했으나, 5월에 PC통신 서비스로 확대해 하이텔, 천리안 대열에 합류했다. 초기에는 회사명인 나우콤으로 서비스를 하다가, ‘나우누리(나, 우리 그리고 함께하는 세상)’라는 서비스 이름은 이용자들에게 공모를 통해 1994년 10월 상용화를 기점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나우누리 이용자들은 비교적 연령대가 젊은 편이었다. 애니메이션을 다뤘던 ‘ANC’, PC게임 및 한글화 패치 모임이 있었던 ‘GMF’, 콘솔게임을 주로 다뤘던 ‘VG’가 생겨났다. 모뎀플레이 모임인 ‘나모모’에는 ‘쌈장’아이디로 유명한 이기석 프로게이머가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또한 리듬게임 동호회인 ‘리듬비트’,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전문 동호회인 ‘미연사모’, TRPG(Table Talk Role Playing Game, 테이블 위에서 펜, 종이, 주사위를 활용한 게임)를 주로 다루는 TRPG동호회가 있었다. 특히 나우누리 TRPG 동호회는 하이텔 TRPG 동호회와 손잡고 ‘RPG컨벤션’ 행사를 몇 년에 걸쳐 개최하기도 했다.

 

 

▲ 나우누리는 뒤늦게 서비스를 시작했지만, 젊고 활발한 동호회 활동으로 하이텔, 천리안에 이어 3대 PC통신으로서의 명성을 쌓아갔다.


당시 유료 PC통신망 중에서 가장 먼저 14,400bps 통신속도를 지원했고, 각 지방의 통신망까지 연결하며 서비스를 확대하기도 했다. 부산과 경상남도는 아이즈(Eyes), 전라도는 포커스(Focus), 대전과 충청도는 센티스(Centis) 등의 통신망과 연계했다. 이후 나우누리는 2006년 나우콤에서 분사한 나우에스엔티로 이관돼 운영됐다.

나우누리 역시 1999년 초고속 인터넷의 보급으로 PC통신 이용자가 줄어들면서 쇠퇴의 길을 걸었다. 2004년부터 2012년까지는 모뎀을 지원하지 않았고, 텔넷(telnet)을 통한 VT접속이 가능했다. 이후 2013년 1월 31일 서비스 종료를 선언하면서 나우누리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90년대를 풍미했던 PC통신
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등 PC통신의 역사는 급변하는 IT환경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 당시 이들 커뮤니티는 지금의 포털사이트에 비해 다소 폐쇄적이었지만 이용자들은 동호회 활동을 통해 서로 정보를 공유하는 등 움직임이 활발했다. 이 과정에서 나름대로의 규칙이 존재하기도 했다.

당시 PC통신 세대들은 전화선을 활용한 모뎀 접속 방식으로 인해 높은 통신비에도 불구하고, 동호회를 통해 함께 울고 웃었던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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