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격’ 행보로 시리즈 정체성 회복하나?

 
[컴퓨터월드] 올해로 ‘디아블로 1’이 출시된 지 19년이 지났다. 내년이면 출시 20주년이다. ‘디아블로 1’은 1997년 블리자드 노스가 출시한 실시간 액션 RPG 장르로 초기에는 많은 비판을 받았지만, ‘묵시록’, ‘베르세르크’ 등과 유사한 세기말 적인 분위기로 인해 추억의 명작으로 남았다.

‘디아블로 1’이 보여줬던 ‘파격’적인 요소는 ‘디아블로 3’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이에 ‘디아블로 1’을 사랑했던 게이머들은 디아블로 특유의 정체성을 잃었다는 이유로 인해 ‘디아블로 3’에 우려를 느끼기도 했다. 그래도 끝까지 많은 게이머들은 블리자드를 신뢰하고 믿었으며, 그 믿음의 결과가 이제 나타나고 있다.

게임트릭스 자료에 따르면 한동안 순위권에서 밀려나고 있던 ‘디아블로 3’은 지난 1월 3주 기준으로 PC방 점유율 4위를 기록했다. 최근 블리자드에서 제공한 ‘디아블로 3’ 2.4.0 패치와 다섯 번째 시즌의 개시는 떠났던 유저들도 다시금 복귀시킬 정도다. 그 이면에는 초기 디아블로에 느낄 수 있었던 ‘파격’과 관련된 요소들이 숨어있었다.


콘도르, 블리자드 본사와 ‘파격’을 논하다
‘디아블로 1’은 게이머들에게 ‘파격’을 선사했다. 정통 RPG에 익숙했던 게이머들은 ‘디아블로 1’을 통해 실시간 액션 RPG라는 신선한 장르를 접하게 됐다. ‘파격’은 정도가 깊으면 깊을수록 하나의 큰 정체성으로 남는다. 지금도 많은 게이머가 ‘디아블로 1’을 그리워하는 현상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파격’을 가져올 수 있었던 배경은 이러했다.

1995년 콘도르(Condor)란 작은 제작사가 ‘디아블로 1’의 제작버전을 가지고 블리자드와 접촉했다. 이 제작버전은 공교롭게도 당시 유행한 턴 제 정통 RPG 장르의 게임이었다.

하지만 블리자드 본사는 기존 턴 제에서 보여준 방식이 아닌 캐릭터가 실시간 액션을 강조한 ‘파격’을 주장했다. 이 주장을 이해하지 못한 콘도르는 당연히 게임이 실패할 것으로 생각했다. 결국 블리자드를 설득하기 위해 직접 디아블로의 턴 제 장르를 실시간 액션 RPG로 수정하기까지 한다.

▲ ‘디아블로 1’을 제작한 블리자드 노스 직원들(출처: diabloii.net)

콘도르는 새로운 장르의 게임을 접하고 나서 이내 깨달았다. 콘도르의 창업자 ‘데이비드 브레빅’은 실시간 액션 RPG는 시장에 실패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가 될 거라고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콘도르는 이후 블리자드 본사에 인수돼 블리자드 노스라는 자회사로 새롭게 출발하게 된다.


블리자드 노스, 음산하고 잔혹한 정체성을 만들다
콘도르는 블리자드 노스란 이름으로 ‘디아블로 1’의 완성도를 높였고, 결국 최종 보스 디아블로가 가지고 있던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극대화하는데 성공한다. 이러한 게임 분위기는 마치 ‘묵시록’, ‘베르세르크’ 등처럼 세기말 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는 데 충분했다. 256색의 투박한 디테일과 채도가 낮고 흐린 색감효과는 오히려 이러한 음산한 효과를 극대화했다.

▲ 1997년 블리자드 노스가 출시한 ‘디아블로 1’ (출처: 블리자드 노스)

실시간 액션 RPG 장르인 ‘디아블로 1’은 잔혹한 시각효과를 통해 게이머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배경음악 역시 지독한 고통을 느끼는 비명이 섞인 음악을 제공해 게이머들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전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디아블로 1’은 출시 초기 실시간 액션 RPG라는 ‘파격’적인 행보에 대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에 대해 ‘디아블로 1’ 출시를 주도한 빌 로퍼 블리자드 노스 사장은 이렇게 받아쳤다. “나는 정통 RPG가 아니라 디아블로를 만들었다.”


블리자드 노스의 공중분해
블리자드 노스는 2001년도 ‘디아블로 2 파괴의 군주’ 확장팩까지 제작하며, 전 세계의 명성을 얻는 기업이 됐다.

▲ 블리자드 노스는 ‘디아블로 2 파괴의 군주’까지 제작했다. (출처: 블리자드 노스)

하지만 블리자드 노스에서 2003년 6월경 제작자 30명이 퇴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블리자드의 모회사 비벤디 유니버설(Vivendi Universal, 이하 비벤디)이 블리자드 노스와 상의하지 않고 블리자드 노스를 매각하려 했기 때문이다.

당시 블리자드 노스의 경영진인 셰퍼 형제와 빌 로퍼는 ‘디아블로 3’을 비공개로 제작하고 있었지만, 비벤디와의 마찰로 결국 블리자드 노스는 2005년 8월에 공식적으로 문을 닫으며 공중분해 됐다. 개발하던 ‘디아블로 3’의 제작은 중단됐고, 자연스럽게 그 제작권이 블리자드 본사에 넘어가면서 기획 단계부터 본질적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이는 디아블로 시리즈가 정체성의 위기를 맞이했던 결정적인 시기로 풀이된다.

▲ 2005년 블리자드 노스가 비밀리에 제작했던 ‘디아블로 3’ (출처: 블리자드 노스)

결국 블리자드 본사에서 ‘디아블로 3’을 기획하게 되면서 몇몇 일부의 블리자드 노스 출신 직원만이 ‘디아블로 3’ 제작에 참여하게 됐지만, 결국 정체성의 문제는 현실화됐다. 제작과정에서 ‘디아블로 3’의 콘셉트를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를 무시한 블리자드 본사는 결국 ‘디아블로 3’ 출시를 강행하기에 이른다.


‘디아블로 3’에서 공중분해 된 오리지널 정체성
블리자드 노스가 문을 닫으면서 ‘디아블로 1’의 정체성은 ‘디아블로 3’에서 공중분해 됐다. 전체적인 게임 분위기가 달라졌다. ‘디아블로 3’에서는 그래픽, 사운드, 다양한 콘텐츠 등이 확실히 업그레이드됐지만, 오리지널의 기본 콘셉트인 음산하고 잔혹한 느낌과 거리가 멀었다.

특히 디아블로 3의 ‘유니콘 방’에 들어가면 완전히 달라진 분위기를 경험할 수 있다.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캐릭터와 발랄한 음악은 마치 다른 게임을 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벤트 맵이라지만 이러한 요소가 게임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점을 고려하면, 기존 오리지널 분위기를 기대했던 팬들에겐 상당한 아쉬움으로 남았다.

▲ 오리지널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디아블로 3’

게임 콘셉트에서 많은 영향을 차지하는 맵 배경도 다르다. ‘디아블로 1’의 배경은 모두 던전 안에서만 이뤄졌다. 던전은 총 16층으로 구성됐으며, 게임 주인공은 마을 근처의 교회, 지하 묘지, 동굴, 지옥에 들어가 전투를 벌였다. 반면 ‘디아블로 3’는 천상, 지상, 지하로 통합된 맵들을 제공했다.

‘디아블로 3’에서는 스킬 수가 늘어났지만 사용할 수 있는 범위를 직업별로 제한했다. 상식적으로 전사 캐릭터를 가지고 파이어볼을 날리며 디아블로를 공략하는 게이머는 별로 없겠지만, 이전에는 워리어(전사) 직업도 마나를 활용해 파이어볼 등을 활용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디아블로 3’에 들어와서는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직업 범위를 ‘부두술사’로 제한하고, 마나 대신 진노, 분노, 비전, 증오·절제 등의 개념을 도입, 각 직업 전용으로 국한하며, 개성이 강해졌지만, 자유도는 낮아졌다.

‘디아블로 1’에서 보여줬던 전설 아이템의 위용도 큰 변화를 거쳤다. ‘디아블로 3’의 전설 아이템들은 직업 전용 세트 아이템에 밀려 재료 아이템 수준으로 전락했다. 이 때문에 게이머들은 세트 아이템을 구하기 위해 반복된 사냥을 해야 했다. 특정 아이템을 착용하지 않으면 일정 난이도를 넘어설 수 없었다. 특히 대균열에서 상위권 랭킹의 플레이어를 살펴보면, ‘독침부두’, ‘비취부두’ 등 획일화된 아이템 세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디아블로 1’은 ‘파격’을 택했고, ‘디아블로 2’는 ‘파격’을 이었고, ‘디아블로 3’은 ‘파격’을 잊었다. 이러한 ‘디아블로 3’을 지켜보던 전 블리자드 노스 출신들은 ‘디아블로 3’에 대해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 이는 시리즈의 정체성 변화가 자칫 게이머들에게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으로 파악된다.

결과적으로는 ‘디아블로 3’는 인터페이스, 캐릭터, 스토리 등의 겉모습은 오리지널과 연결되거나 진화됐지만, 정작 오리지널이 선사했던 게이머의 자유와 선택권이란 즐거움까지는 살리지 못했다.

이를 지켜본 빌 로퍼 전 블리자드 노스 사장은 정체성의 변화에 대해 “‘디아블로 3’은 그렇게 만들면 안 된다”고 비판했다. 2005년도에 빌 로퍼 사장이 비공개로 추진했던 ‘디아블로 3’의 게임화면은 블리자드 노스의 뜻이 살아있었다.

오리지널만의 ▲음산하고 어두운 분위기 ▲전작과 상당히 유사한 인터페이스 ▲전사계열이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점 등을 볼 수 있다. 전 세계 네티즌들은 빌 로퍼의 이런 ‘디아블로 3’ 게임화면을 보고 현재의 ‘디아블로 3’보다 오리지널의 정체성을 살렸다는 의견을 내놨다.


‘파격’적인 패치로 정체성 회복을 시도하다
지난 2012년 5월 출시된 ‘디아블로 3’은 출시 이전부터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출시 직후 24시간 동안 전 세계적으로 350만 장 이상이 판매됐으며, 2014년 3월 출시된 ‘영혼을 거두는 자’ 확장팩 역시 출시 1주일 만에 전 세계적으로 270만 장 이상 판매를 기록했다. 같은 해 8월 콘솔 버전인 ‘대악마판’은 플레이스테이션 3(PlayStation 3), 플레이스테이션 4(PlayStation 4), 엑스박스 360(Xbox 360), 엑스박스 원(Xbox One)으로 정식 출시됐다.

2005년 블리자드 노스가 문을 닫은 이후, 블리자드 본사는 직접 ‘디아블로 3’의 기획 단계부터 시작했다. 제작과정에서 상당한 비판과 우려를 받았음에도, 결과적으로는 상당한 판매량을 올렸다. 전 세계 게이머들은 블리자드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유지했다. 결국 본사가 출시한 ‘디아블로 3’ 초기 모습은 오리지널 시절의 음산하고 어두운 배경을 버리고, 좀 더 다양한 게이머 층을 만족하기 위해 캐주얼하게 다가서기 위한 대중적인 게임으로 탈바꿈했다.

최근 블리자드의 행보는 주목할 만하다. 블리자드는 2016년 1월 14일에 2.4.0 공식 업데이트 패치를 발표했다. 이를 통해 과거의 디아블로 정체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이번 업데이트는 패치가 아니라 확장팩 수준이었다.

2.4.0 패치에는 ▲‘회색 공허 섬’, ‘영겁의 숲’과 ‘왕실’ 등 신규 지역이 추가됐고 ▲새로운 개념의 콘텐츠인 ‘세트 던전’을 도입했다. 또한 ▲보석을 4번 강화할 수 있는 ‘강화 균열’을 추가하고 ▲게임 내 영향력이 높아진 전설 아이템 등이 대량 추가됐다. 이밖에 ▲세트 아이템과 ▲보관함 공간이 추가되고 ▲시즌 여정 ▲개선된 사용자 인터페이스를 개선하는 등 여러모로 게임성을 위해 노력한 흔적이 보였다.

게다가 블리자드는 패치 적용 다음 날에 다섯 번째 신규 시즌까지 개시해 많은 복귀 유저들을 끌어 모았다. ‘디아블로 3’의 시즌 모드는 과거 작에는 없었던 새로운 방식으로, 정해진 시점부터 새로운 캐릭터를 생성해 다른 게이머와 같이 출발할 수 있으므로, 누구든 공정하게 경쟁에 참여할 수 있다.

▲ ‘디아블로 3’는 1월 4주차에 PC방 점유율 4위를 기록했다. (제공: 게임트릭스)

결국 블리자드는 ‘디아블로 3’에 대한 2.4.0 패치를 발표하면서 PC점유율 순위를 크게 올렸다. 게임트릭스 조사에 의하면 2016년 1월 4주차 PC방 점유율 부문서 ‘디아블로 3’가 4위를 기록했다. 다섯 번째 시즌으로 시작된 순위 변화는 1월 2주차에 14위로 출발해 1월 3주차에는 6계단이 상승하고, 4주차에는 4계단 더 상승하며 4위에 올라서는 성과를 올리게 된다.

PC방 사용시간도 큰 폭으로 올랐다. 1월 4주차에서는 지난주 보다 83.63%나 증가했다. 이 영향으로 ‘스타크래프트’, ‘리니지’, ‘던전 앤 파이터’, ‘블레이드&소울’ 등은 각각 1계단씩 내려가 5위, 6위, 7위, 8위를 기록했다. 특히 ‘디아블로 3’가 PC방보다는 집에서 즐기는 게이머가 더 많은 게임인 걸 고려하면 실제 게이머들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디아블로 3’는 출시 이후 매번 업데이트 통해 기존의 틀을 부수는 ‘파격’적인 업데이트로 나름대로의 개성과 색깔을 형성했다. 최근 2.4.0 업데이트 패치 역시 ‘파격’으로 마치 전성기 시절의 디아블로와 나란히 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오리지널을 제작하던 블리자드 노스는 사라졌지만, 결국 게이머들의 즐거움을 추구한다는 목적에서는 같았다.

현재 블리자드는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만약 오리지널 디아블로를 그리워하는 게이머가 ‘디아블로 3’을 통해 과거의 정체성을 느낄 수 있는 시점이 온다면, 블리자드는 디아블로 시리즈의 출시 20주년을 빛냄과 동시에 게이머들에게 더욱 사랑받는 게임 회사로 각인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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