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사용자 2,500만, 기반시설 구축으로 첨단 정보화 기틀 마련

[컴퓨터월드] 김대중 정부의 5년을 IT 관점에서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인터넷 5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 정부에서도 정보통신 산업은 미래 산업으로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구체적인 정책이 수립되거나 집행되지는 못했다. 그저 세계적인 IT화 조류에 편승해 정보통신 정책을 추진한 면이 강했다. 반면, 김대중 정부는 출범할 때부터 IT 선진화의 청사진을 그리고 정책을 구체화 했다는 점에서 이전 정부와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실제 김대중 대통령은 후보시절 1인 1PC 시대 실현, 중‧고교에 정보화 과목 배정, 효율적인 전자정부 구현, 개인의 사생활 정보보호, 초고속 정보통신망 구축 등 구체적인 공약을 제시하기도 했다. 김대중 정부 5년의 정보통신 산업을 되짚어봤다.

 

인프라 투자 주도, 혁명적 변화 가져왔다.

김대중 정부가 진행했던 여러 가지 정책 가운데서 IT 정책은 햇볕정책과 더불어 훌륭한 공적으로 꼽힌다. 두 분야 모두 이전 정부와는 차원이 다른 변화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가 현재 인터넷 강국으로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은 김대중 정부의 인터넷에 대한 투자가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김대중 정부는 정보통신 인프라를 지식정보화 사회의 기본으로 인식, 집권 초기부터 인터넷 인프라 구축을 도모함으로써 IT 산업 고속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출처: 컴퓨터월드 2002년 9월 호)
김대중 정부는 정보통신 인프라를 지식정보화 사회의 기본으로 인식, 집권 초기부터 인터넷 인프라 구축을 도모함으로써 IT 산업 고속 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 (출처: 컴퓨터월드 2002년 9월 호)

김대중 정부는 출범 당시 ‘창조적 지식기반 국가의 미래상’을 만들어간다는 큰 틀을 짜고 ‘사이버코리아 21’이라는 정보화추진 2차 계획을 수립했다. ‘사이버코리아 21’의 주요 내용은 △인프라 확충 △DB 확보 △산업 육성이었다. 특히 인프라를 지식정보화 사회의 기반으로 인식하고 정보통신망의 고속화‧고도화를 적극 추진했다. 김대중 정부 출범 당시 5년 후인 2002년에 100배 빠른 인터넷을 구현한다는 목표를 세우기도 했다.

 

인프라를 지식정보화사회의 기반으로 인식

김대중 정부는 출범 당시 2001년 인터넷 가입자 1천만 명 시대를 열고 98년에 33.8Kbps였던 보편적 서비스의 속도를 2002년에는 2Mbps까지 끌어올리는 것을 골자로 한 정보통신 4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하지만 2001년 국내 인터넷 가입자 수는 2,438만 명, 초고속 인터넷 이용가구 수는 781만에 이르러 목표를 훌쩍 뛰어넘었다. 2002년 6월말 기준으로 가입자 2,565만 명에 초고속 인터넷 이용가구 921만을 기록했다.

당시 정보통신부 정보화기획실 나승식 서기관은 “종합적인 시각에서 DB구축, 설비 투자, 산업 육성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인프라 측면에서 강해지게 됐다”고 말했다. 나 서기관에 따르면 2002년까지 정보통신망의 고속화‧고도화에 배정된 예산만 10조 4천억 원 규모였다.

2001년 인터넷 이용자 및 초고속인터넷 가입 가구 (출처: 컴퓨터월드 2002년 9월 호)
2001년 인터넷 이용자 및 초고속인터넷 가입 가구 (출처: 컴퓨터월드 2002년 9월 호)

인터넷 정책은 크게 인프라와 콘텐츠로 구분해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김대중 정부시절 인프라 부분은 목표 이상의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물론 부작용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정부가 인프라에 적극 투자한 결과, 생활 속에서 그 효과가 빛을 발했다는 점은 당시 높게 평가받았다.

인프라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콘텐츠도 조금씩 꽃을 피우고 있는 단계였다. 한국인터넷이용자포럼 대표였던 한양대학교 윤영민 교수는 “3~4년 전만 하더라도 콘텐츠도 없는데 인프라만 깔면 뭐하냐고 지적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가 깔아놓은 인프라로 인해서 우리는 드디어 제대로 된 콘텐츠라는 것들의 혜택을 맛보고 있다”고 평가했다. 조금씩 나아지는 과정을 겪어왔기에 미처 느끼지 못할 수도 있지만 3~4년 전과 비교하면 당시의 모습은 혁명적인 변화였다.

 

인터넷이 가져다준 믿기지 않는 변화

김대중 정부가 구축한 인프라를 바탕으로 한 정보화의 성과는 사회 곳곳에서 나타났다. 단순히 인터넷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콘텐츠가 많아지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활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이들은 변화를 가장 크게 체감한 분야로 공공기관을 꼽았다. 공공기관이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고 대국민 서비스를 개선하는 등 가장 적극적으로 인터넷을 활용한 것이다. 한 예로 정부에서는 해마다 공공혁신과제 우수사례를 선정했는데 99년과 2000년에는 IT와 관계가 있는 사례가 전무했다.

그러나 2001년에 신청한 600여건의 혁신 우수사례 가운데 상당 부분이 정보기술과 관련된 것이어서 이 분야의 전문가가 심사위원에 합류하기도 했다. 특히 본선에 올라온 30건 사례가운데 약 40%가 정보기술 기반의 혁신사업들이었다. 2002년에는 이 비율이 60%로 높아졌다. 정부기관의 혁신 사례 가운데 절반 이상이 온라인을 이용한 사업들이었다.

이런 변화는 중앙부처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도 나타났다. 경북 달성군에서 농작물 전자상거래 시스템을 구축했는데 사이트에 접속한 사람이 달성군에 있는 것으로 느낄 정도로 고품질의 그래픽을 이용했다. 또 부천에서는 버스 정류장에 다음 버스가 어디쯤 오고 있고 몇 분 뒤면 도착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시스템을 구축하기도 했다.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민간 부문에서도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사고 강의를 듣고 영화를 볼 수 있게 됐다. 저렴하게 국제전화를 이용할 수 있는 인터넷 전화나 자기 PC 화면을 보며 전국에 흩어져 있는 직원들과 회의를 할 수도 있었다. 이 또한 인프라가 갖춰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초고속인터넷 구축 경험 수출로도 이어져

김대중 정부에서 구축한 인프라는 세계 각국 기업으로부터 크게 주목받았다. 미국이나 유럽 등 선진국에서도 모뎀으로 인터넷에 접속하는 사용자가 훨씬 많은 상황에서 전국적으로 고속 인터넷 망이 깔린 우리나라 네트워크 장비와 콘텐츠 제공업체들이 자사 제품이 이상없이 운영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하고 싶어했다. 우리나라가 수많은 인터넷 장비와 애플리케이션, 콘텐츠들의 시험무대가 됐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시험무대가 됐다는 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도 있었으나, 이로 인해 국내 IT기업들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한발 앞서 만들어낼 수 있게 되는 등 긍정적으로 작용한 면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정부의 주도로 짧은 시간에 초고속 인터넷 환경을 구축한 것은 세계 각국의 부러움의 대상이 됐으며 각종 통신 장비를 수출할 수 있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동남아 지역에 국산 ADSL 장비들이 수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KT는 초고속 인터넷망을 구축한 경험과 국산 ADSL 장비를 한데 묶어 베트남, 중국 등에 수출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초고속 인터넷의 전사회적 확산을 기반으로 한 첨단 정보화의 실현은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올라가는 계기로도 작용했다. 당시 OECD 전자정부 워크숍에서 한양대학교 윤영민 교수가 전자정부를 주제로 한 발표를 한 내용에 대해, 참석한 다른나라 관계자들이 발표한 내용들이 실현가능하냐는 의문을 보일 정도로 우리나라의 인터넷에 대한 기반 기술이 앞서 있었다.

 

IT산업 경쟁력 높이는 토대 마련했다

김대중 정부는 전국 어디서나, 국민 누구나 초고속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는 정보통신 인프라를 구축했다. 초고속 인터넷 가구당 보급률을 보면 한국은 54.3%로 영국(0.8%), 일본(6.3%), 미국(13.1%) 등의 나라들이 따라올 수 없는 수준에 도달했다. 이 기간 동안 정보 소외계층의 인터넷 이용도 수십 배가 늘어났다.

물론 미흡한 점도 있었다. 일반 사용자들이 생활 속에서 인터넷을 좀 더 적극 활용할 수 있도록 이끄는 노력이 부족했고 사회‧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선도적인 응용기술을 제대로 개발해내지 못했다는 것을 정부 스스로 인정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과제들 또한 안정된 인프라 위에서 제대로 구현될 수 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였다. 초고속 인터넷 부문의 전략적인 투자로 정보이용의 저변을 확대하고 정보통신 산업의 경쟁력을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국민의 정부가 추진한 인터넷 정책은 많은 성과를 남긴 것으로 평가됐다.

 

새로운 세상, 인터넷을 인정하라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문화공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그 새로운 공간에서 이용자들의 권리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다. 오프라인에서 그 세계를 어떻게 규정할지 원칙을 정하고 이것을 기초로 한 필요한 법률과 관습을 만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국민의 정부에 쏟아졌던 비판과 질책은 이 과정에서 출발부터 단추가 잘못 채워졌다는 데서 비롯됐다.

국민의 정부는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나 이 분야를 전문으로 연구하는 학자들의 대답은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문화 공간, 새로운 세상을 인정하지 않는다”였다.

서울시정개발연구원 라도삼 박사는 이 같은 정부의 입장에 대해 우리 정권이 그동안 ‘문화’라는 분야를 어떻게 다루어왔는지에 이미 그 해답이 나와있다고 설명했다. “정부 입장에서는 해방 이후에 제대로 된 문화정책이란 것이 없었다. 문화를 정치 이데올로기의 선전 수단으로나 쓰던 상황에서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문화가 생기자 매우 당혹스러웠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정보통신부가 정작 중요한 문제들에서는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정보문화센터라는 사이버 경찰을 앞세워 인터넷 공간과 맞부딪히면서 규제에만 매달려 왔다”고 지적했다.

문화연대 이동연 사무차장은 “인터넷이라는 변화된 문화환경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지적재산권 문제가 불거지고 개인의 알권리를 놓고도 서로 다른 견해가 대립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용자 권리는 뒷전, 규제에만 바빠

수많은 네티즌들과 시민단체, 학자들은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인터넷 정책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이용자 권리를 지켜준 데는 관심이 없고 부처 이기주의와 행정편의를 중심으로 각종 제도와 법률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을 꼽았다. 이 때문에 실제 소비자인 네티즌의 의견이 정책에 전혀 반영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인권적 측면에서도 위험한 기획들이 많았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비판의 중심에는 정보통신부가 자리잡고 있었다. 정통부가 정보사회의 발전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제 몫 챙기기에만 바쁘다는 원성은 이미 하루이틀 지적되고 있는 얘기가 아니었다.

소비자보호원 강성진 박사는 “한마디로 정책의 과잉이었다고 본다. 정부에서 세계 최초라는 여러 법률을 만들었지만 이러한 법률들이 시장의 활성화나 사업자들의 불이익을 막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법적 영역을 확보하거나 기구 설치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꼬집었다. 그는 전자상거래내용법을 예로 들면서 “그 내용이 이름에 걸맞지 않게 정부의 시책을 못 박고 위원회의 존재 근거만을 만들어주고 있다. 전자상거래와 관련해서 가장 잘못된 것들을 압축해놓은 것으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김대중 정부 인터넷 정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규제와 검열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정보통신부는 내용규제 관련 법률을 직접 행사하는 등 제 몫 챙기기에만 바쁘다는 비난에 휩싸였다. (출처: 컴퓨터월드 2002년 9월 호)
김대중 정부 인터넷 정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규제와 검열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었다. 특히, 정보통신부는 내용규제 관련 법률을 직접 행사하는 등 제 몫 챙기기에만 바쁘다는 비난에 휩싸였다. (출처: 컴퓨터월드 2002년 9월 호)

국민의 정부의 인터넷 정책은 ‘기반을 구축하고 사회적으로 흐름을 바꿔놓은 것은 크게 평가할 만하지만 그 내용을 충실하게 하는 노력은 부족했다’는 성과와 한계를 함께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의 인터넷 정책은 이전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5‧6공화국 시절에도 정보통신 산업이 미래 산업이었다. 전 세계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비하려는 준비가 다분이 추상적이었다.

 

능동적인 IT 정책 추진

김영삼 정부는 이보다는 좀 더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정보화 계획을 추진했으나 이것이 스스로의 의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보통신부 나승식 서기관은 “김영삼 정부의 정보화 추진은 93년 미국의 엘 고어가 주창한 ‘인포메이션 하이웨이’에 자극받아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들이 IT 인프라 확충에 뛰어든 것에 동참하면서부터”라고 평가했다.

이로 인해 94년에 초고속 정보통신망구축기획단이 생겼고 이 때부터 정보화 정책이 수립되기 시작했다. 당시 이 기획단에 재경원, 예산처, 행자부, 과기부, ETRI, 전산원까지 다 참여하고 있었는데 95년 말 정보통신부가 탄생하자 96년에 정보화 기획실로 자리를 잡기에 이르렀다.

당시 기획단에 참여했던 나 서기관은 “김영삼 정부 때는 외국의 정책을 모방했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없었다”고 말했다. 미국이 저렇게 나가고 다른 모든 나라들도 다 하니까 우리도 해야 된다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성과가 나오기 시작한 것은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부터였다. 김대중 정부는 출범하면서부터 IT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섰다. 특히 정부는 빠르게 변해가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96년부터 2000년까지 실행키로 했던 제1차 정보화촉진 기본계획을 서둘러 마무리하고 93년 3월 2차 기본계획인 ‘사이버코리아 21’을 발표했다. 이 정책은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가 93년 이후 미국의 장래를 위해 지식정보사회에 대비한 10대 분야별 정책방향을 제시하고 SW개발, 정보인프라 조기 확충 등에 집중 투자하기로 한 것에 적지 않은 자극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2002년 8월 명동 한빛은행 사거리에서는 정통부장관 퇴진을 위한 60일 릴레이 단식 농성과 함께 문화제가 진행됐다.  (출처: 컴퓨터월드 2002년 9월 호)
2002년 8월 명동 한빛은행 사거리에서는 정통부장관 퇴진을 위한 60일 릴레이 단식 농성과 함께 문화제가 진행됐다.  (출처: 컴퓨터월드 2002년 9월 호)

 

‘경제 회복’ 목표 아래 빠르게 성장

‘사이버코리아 21’은 인프라 확충, DB 확보, 산업 육성이라는 세 분야에 역점을 둔 정책이었다. 특히 IMF가 생기면서 정보화를 통해 경제를 뒷받침할 방안을 새롭게 만들어보자는 것이 ‘사이버코리아 21’을 만든 계기 중 하나였다. 특히 인터넷 인프라에 과감하게 투자하고 전 사회적인 정보화 분위기를 만들면서 IMF로 모든 분야가 침체되는 가운데서도 IT 분야만은 고속 성장을 계속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나승식 서기관은 “‘사이버코리아 21’을 내놓으면서 전체적인 흐름을 잡아놓은 것을 계기로 사회 전 분야가 이를 따라오게 됐다. 완전히 민간에 맡겨놓았던 나라들에서 투자가 위축됐던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였다”고 설명했다. 경기침체로 운영비용을 줄이기 위해 고심하던 기업들이 IT 기술에 눈을 돌린 것도 한 몫을 한 것으로 평가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이버코리아 21’의 정책 기조에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부에서는 국민의 정부가 정보기술을 중요하게 인식하기는 했지만 결국 경제를 재건하고 산업기반을 첨단화시키는데만 주목했다는 점에서 김영삼 정부와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었다.

한 시민단체 관계자는 “김영삼 정부의 강봉균 장관과 현 정부 초기의 안병엽 장관이 모두 경제기획원 출신이었다”며, “정부가 정보통신부 장관에 IT 전문가를 배치하지 않고 경제전문가를 내세운 것은 IT 분야에서 경제개발이 가장 중요한 목표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그 결과 정책 전반에서 공급자를 중심에 놓게 됐으며 이는 이용자의 권리를 축소하고 규제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게 됐다는 것이다.

 

새로운 청사진, ‘e-코리아 비전2006’

정부는 2002년 3차 기본계획인 ‘e-코리아 비전2006’을 내놓았다. 국민의 인터넷 활용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 국제 협력에 적극 나서 21세기 지식정보 사회의 글로벌 리더로 도약한다는 비전이 핵심내용이었다.

정통부 나승식 서기관은 “지금까지 인프라 확충에만 집중하다보니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그것이 내 생활에 어떤 도움이 되고 있는지를 잘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이제는 사용자가 좀 더 풍족하게 인터넷을 쓰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말했다. 수요자 입장에서 편리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주민등록등본은 대부분 공공기관과 금융기관, 공공기관과 공공기관 사이에서 필요한 것인데도 내가 그것을 발급받아서 다른 쪽에 제출해야 한다. 이런 불편을 없게 하겠다”는 것이 나 서기관의 설명이었다.

이에 따라 ‘e-코리아 비전2006’은 정부가 어떤 좋은 시스템을 구축했는가가 아니라 국민이 얼마나 편리한가라는 측면에서 접근을 시도했다. 온라인 민원 서비스 확산, 정보화를 통한 정부업무의 지속 혁신, 재정 및 사업 과학기술 행정의 정보화 확산, 복지‧환경 행정서비스의 확대, 교육‧문화정보 서비스의 고도화, 정보화를 통한 외교‧사법 및 안전관리 업무의 효율성 제고 등 공공분야에 크게 역점을 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당시 정부는 이와 함께 동북아 협력을 통한 세계시장 선도, 국제기구에서 주도적 역할 수행, 글로벌 정보격차 해소 지원, 국제 IT 인프라 구축 확대, IT 기업 해외진출 지원 강화 등 글로벌 정보사회를 향한 국제협력 강화에도 방점을 찍었다. 이를 위해 연도별 실행계획 및 세부과제 관리계획을 만들어 수시로 점검하고 2006년까지 약 70억 원을 투자한다는 구체적인 추진전략도 세웠다.

 

새로운 의사소통 시대에 어울리는 의식 필요

나승식 서기관은 “이번 정책이 또다시 내년에 수치상의 목표에 도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수위는 달라져야 하겠지만 기본 골격은 흔들리지 않아야 된다는 점에 신경 썼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정보화의 실생활 적용이 가장 앞서 있는 상황에서 과거처럼 외국의 모델을 참고할 수 없기에 국내외의 모든 전문가들의 의견을 총망라해서 만든 것이 바로 ‘e-코리아 비전2006’이라고 했다. “남들은 이제 고민을 시작하고 있는 것들을 이미 다 가져가고 있는 상태에서 한 치원 앞으로 내다보고 만들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새로운 정책을 내세우기보다 정부와 IT 담당자들의 마인드가 바뀌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라고 충고했다.

한국인터넷이용자포럼 대표였던 한양대학교 윤영민 교수는 “민간 영역과 공공 영역의 경계, 개인 사이의 경계. 조직과 조직과의 경계가 쉴 새 없이 무너지고 있는데 유독 정부나 정책 담당자들이 그 상황에 잘 적응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새로운 의사소통 공간에 맞는 새로운 규범, 새로운 관습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아직 안되고 있는 것은 의식의 변화가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이었다.

정부의 의식변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김대중 정권이 큰 힘을 쏟고 있는 전자정부 추진에도 비판의 목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함께한 시민행동의 김영홍 정보정책 2팀장은 “각급 기관이나 자치단체의 마인드를 보면 홈페이지만 있다고 전자정부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김대중 정부가 임기 안에 꼭 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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