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순 회장
넥스젠테크놀러지
올해로 고희를 맞은 이덕순 회장은 우리나라 정보통신 산업계의 산증인이다. 1961년 미 8군 프로그래머로 시작해 콘트롤데이타코리아, 삼보소프트웨어, 한국OEC를 거쳐 지금은 넥스젠테크놀러지의 회장으로 평생을 정보통신 산업계에서 일해온 정보통신 산업계의 원로중의 원로이다. 올해로 창간 20주년을 맞이한 컴퓨터월드는 이덕순 회장을 만나 국내 정보통신 산업을 되돌아보고 특히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산업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들어봤다.
박시현 기자 pcsw@infotech.co.kr

1967년은 국내 정보통신 산업계에 특별한 한해이다. 당시 황무지와 다름없는 국내 정보통신 산업계에서 KIST가 대형컴퓨터를 도입하고 처음으로 한국인을 대상으로 컴퓨터 교육을 시작한 첫해이기 때문이다.
당시 KIST가 도입한 대형컴퓨터는 콘트롤데이타의 CDC3300. 메모리가 고작 32K로 90년대초에 선보인 XT급 PC 보다 훨씬 낮은 사양이었으며, 크기도 집채만 했다. 하지만 가격은 350만달러로 KIST 전체 건물 보다 비쌀 정도로 엄청난 고가였다.

KIST에서 전산 인재 양성
KIST는 이처럼 대형컴퓨터를 도입하고 컴퓨터 인재 양성을 위해 본격 교육을 실시했는데 강의자가 바로 당시 콘트롤데이타코리아에 재직했던 이덕순 회장이었다.
"강의 내용은 비트가 무엇이냐 부터 운영체계, 개발 언어 등 그야말로 영어로 치면 ABC격이었다. 교육 1기생이 모두 16명이었는데 동명정보대 총장을 지낸 성기수 박사나 안문석 고대 부총장 등이 그때 멤버들이었다. 이러한 1기 멤버들은 우리나라 정보통신 산업계 0세대 쯤 될 것이다. 이처럼 KIST에서 교육과정을 거쳐 양성된 인재들은 민간 기업으로 널리 퍼져나가면서 국내 정보통신 산업 발전의 토대 역할을 수행했다." 그렇지만 KIST나 이곳 출신의 인력들이 국내 정보통신 산업의 발전에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는 게 이덕순 회장의 회고이다.
"당시 KIST는 모든 정부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한곳에서 모든 정부 프로젝트를 독점한 것이다. 또 이곳 출신의 인사들이 회사를 설립해 민간 기업의 프로젝트를 거의 수주했다. 결국 이러한 환경은 순수 국내 소프트웨어 업체들이 뿌리를 내리는데 걸림돌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소프트웨어의 출발이 늦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회장은 이어 당시 KIST가 수행한 정부 프로젝트의 성과물에 대해서도 꼬집는다. "민간 기업에서 좋은 조건으로 KIST의 인력들을 빼가다 보니 KIST 안에는 정작 프로젝트를 수행할만한 경험있는 인력을 많이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프로젝트의 실패 확률도 컸으며, 실제로 프로젝트가 망가지기도 했다."

한글화 성공, 서울시 고지서 한글로 처음 찍어
1968년에는 국내 정보통신 발전의 계기가 됐던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바로 컴퓨터의 한글화이다. 당시는 한글로 프린터를 할 수 없던 시절이었는데 이덕순 회장이 주역이 되어 한글 출력이 가능한 시스템을 개발하고, 이를 통해 서울시의 무슨 고지서를 한글로 찍어 내는 개가를 올린다.
1976년까지 콘트롤데이타코리아의 선임 컨설턴트로 일한 이 회장은 1977년 전격 미국으로 갔다가 11년만에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콘트롤데이타 본사에서 4세대언어(4GL)의 개발을 총괄했던 이 회장이 귀국하자 삼성데이타시스템(지금의 삼성SDS)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는다. 골자는 이 회장이 개발한 4GL의 클라이언트 서버 버전을 만들자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이용태 회장을 만나 삼보 쪽으로 방향을 틀고 삼보컴퓨터에 입사하고, 이어 삼보소프트웨어를 설립한다.
이 회장은 삼보소프트웨어에서 4GL의 개발에 나서 4년만에 XL4라는 국산 4GL을 내놓았다. DOS 환경의 이 제품은 국방부, 조달청 등 몇곳에 보급됐다. 그러나 곧장 암초를 만났다. 윈도우즈 환경의 파워빌더가 나오면서 국내에서 개발한 이 4GL 제품의 입지가 사라진 것이다."좀더 빨리 만들었으면 국산 4GL이 자리를 잡았을 텐데 아쉬움이 많았다. 좋은 기회였는데 당시에 삼보의 상황이 어려운 시기라서...결국 타이밍을 놓쳐버린 셈이다."

신기술 전파에 핵심 역할
이덕순 회장은 국내 정보통신 산업계에서 신기술 전파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꼽힌다. 운영체계나 DB 뿐만 아니라 4GL과 같은 툴, 그리고 3계층 분산 애플리케이션 미들웨어 등이 단적인 예이다.
1995년 이 회장이 한국OEC를 설립하고 국내 최초의 3계층 분산 애플리케이션 미들웨어인 엔테라를 발표한 것이나 현재 재직중인 넥스젠테크놀러지가 CBD나 EA 등 새로운 기술의 확산에 매진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기술이나 경험, 그리고 영어 등 교육받을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 미국에서 새로운 기술이나 시스템이 나오면 바로 교육받아 이를 한국에서 전파할 수 있었다."
이 회장은 국내 정보통신 산업을 발전시킨 정책으로 주전산기 개발 사업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빨리 유닉스와 오픈 환경을 접했을 뿐만 아니라 서버 기술을 갖추게 된 점은 바로 주전산기 개발 사업 덕분이라는 얘기다. 실제로 주전산기는 국내에서 유닉스 보급을 확산하고 그만큼 소프트웨어 시장 확대에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이라도 전문 기업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을 만들자"
이 회장은 평소 "소프트웨어 산업이 없으면 다른 산업은 있을 수 없다. 모든 산업의 견인차가 바로 소프트웨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소프트웨어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뜻일 게다. 그러나 국내 소프트웨어 산업의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나라는 미국 등에 비해 기술력이 절대 열세로 거의 외산 제품을 사다 쓰고 있다. 소프트웨어 수출이라고 할 만한 것도 거의 없다."
왜 그럴까? 이 회장은 우리나라가 시스템 소프트웨어 개발에서 절대적으로 뒤지는 이유를 들어 이를 설명한다.
"소프트웨어는 크게 애플리케이션 소프트웨어와 시스템 소프트웨어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시스템 소프트웨어는 무에서 유를 생산하는 일로 창의력이 필요하다. 미국은 창의력을 키워주는 교육을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암기 교육뿐이다. 이런 교육 풍토에서는 절대 창의력을 기를 수 없고, 시스템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수도 없다."
이 회장은 국내 소프트웨어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이유로 이러한 문제 외에 '사용자의 수준'을 제기한다. "건축과 소프트웨어를 한번 비교해 보자. 재개발이라는 말이 나오는 나라는 한국 뿐이다. 미국은 100~200년 된 아파트가 많다. 그만큼 잘 지었다. 한국은 과연 그런가. 소프트웨어도 똑같은 이치이다. 우리나라 만큼 소프트웨어의 재개발이 많은 곳이 있는가. 엉터리로 만들어도 무턱대고 구입하고 나서 문제가 발생하면 나중에 다시 하자는 사용자의 자세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오픈 환경으로 빨리 간 이유도 나쁘게 보면 재개발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집을 짓는데 중요한 것은 질이 아닌가. 싸게 지어놓고 얼마 안돼 재개발하면 무엇 하는가. 사용자가 아무것도 모른채 무조건 알아서 해달라고 주문하는데 그래서는 안된다. 품질을 높이려면 사용자가 잘 알아야 한다."

정부 저가입찰과 SI 업체 덤핑 악순환 구조
이 회장은 이러한 현상이 빚어진 구조적인 문제로 정부의 저가 입찰 정책과 대형 SI 업체의 덤핑 공세를 지적한다.
"요즘 정부 프로젝트의 참여하는 인력의 단가가 월 300만원 정도이다. 이들은 주로 프리랜서들로서 막노동꾼으로 비유할 수 있다. 적어도 750만원 정도는 받아야 하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바로 저가 수주한 SI 업체들이 비용절감을 들어 하청업체에게도 원래보다 낮은 가격에 일감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정부의 저가 입찰 정책과 대형 SI 업체의 덤핑 공세는 중소 전문기업의 몰락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정부가 프로젝트를 지금처럼 무조건 대형 SI업체에게 모두 맡기는 것이 아니라 각 분야에서 특기가 있는 전문업체에게 나눠주면 중소기업의 육성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그렇게 해야만 중소기업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소신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 회장의 설명에 따르면 정부가 그만한 전환적인 사고와 의지를 갖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실시된 정부공공 프로젝트의 중소기업 참여 보장 정책의 실효성이 없는 것이 단적인 예. 정부는 마땅히 중소기업이 수주해야할 프로젝트를 컨설팅 업무는 예외라는 규정을 만들어 대형 SI 업체들이 수주할 수 있는 길을 터주고 있다.
한편 이 회장은 정부가 펼치고 있는 소프트웨어 육성 정책에 대해서도 질타를 가한다. "정부의 육성책이 있는가? 전혀 생각이 안난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추진하는 프로젝트부터 제값을 주고 품질 위주로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소프트웨어 애플리케이션을 세분화하고 전문화해 전문 중소기업이 여기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줘야 한다."

우리나라 SW 경쟁력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회장은 우리나라 소프트웨어 산업의 미래에 대해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앞으로 애플리케이션 소프트웨어를 집중 육성하고 이의 성과를 앞세워 중국이나 동남아 시장에 진출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이라는 게 이덕순 회장의 분석이다.
"한국은 중국이나 동남아 진출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입장이다. 유닉스 환경의 오픈 시스템 개발에 빨리 뛰어들어 이 부문의 애플리케이션 구축 노하우가 많기 때문이다. 미국은 거리가 먼데다 문화적인 차이도 크고 단가도 높다는 문제가 있다. 우리가 지금 강세를 띠고 있는 게임과 통신 등의 소프트웨어를 글로벌 스탠더드에 입각해 개발하고 이를 앞세워 해외에 진출하면 승산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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