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 국내 고성능 모니터 시장 독점 우려

 

[컴퓨터월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상품은 그 상호가 곧 해당 분야의 제품군을 통칭하는 대명사가 되기도 한다. 소니의 워크맨 역시 그 대표적인 예로, 이 땅의 80~90년대 청춘들 중 워크맨으로 음악을 들어보지 않은 이는 드물 것이다. 친구와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꼽고 음악을 즐기며 함께 거니는 풍경은 그 자체로 젊음을 상징하곤 했다.
워크맨을 비롯해 TV부터 게임기까지 전 세계 가전 시장을 제패하며, 한때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롤 모델로 삼기도 했던 소니. 그러나 근래 들려오는 구조조정과 위기론은 새삼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소니의 20년 전 영광의 한 토막을 되짚어보며 그들의 현 주소를 바라본다.

 

110V 콘센트가 사라졌다

▲ 110V 콘덴서

1993년 11월 전자제품의 사용전압을 220V 전용만 허용하는 시행령이 발표된 이후, 1994년의 국내 고성능 모니터 시장도 이에 따른 후폭풍을 겪고 있었다. 110/220V 겸용 모니터의 수입이 불가능하게 됨에 따라, 국내 시장 공략을 위해 220V 전용 제품을 생산키로 한 소니의 독점현상 심화와 함께 가격 상승 및 공급 부족까지 닥쳐왔다.

당시 업계에서는 이 같은 현상에 대해 ‘혹 떼려다 혹 붙인 꼴’이라며 220V 전용제품만을 허용하는 시행령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220V 시행령의 표면적인 이유야 어떻든 수입억제를 위한 방안으로 이 같은 정책이 추진된 것으로 알고 있다는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 시행령 발표 이후 워크스테이션용 모니터 시장에서 국산제품의 수요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 특정업체의 입지만 강화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당시 업계 관계자들은 특히 110/220V 겸용제품을 허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 220V 승압이 전력손실을 줄이고 발전설비의 투자효율을 높일 수 있는 등 장점이 있지만, 국내 여건 상 겸용제품 사용까지 막을 이유는 없다는 것. 한국전력의 한 관계자마저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트리니트론의 전설

▲ 트리니트론 모니터, 본지 94년 4월호 기사 발췌

94년 660억 원 규모로 추산되던 국내 고성능 모니터 시장에서 당시 업계는 소니의 점유율이 대폭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매년 25%씩 고속 성장하고 있던 국내 시장을 소니 한 업체가 220V 전용 제품을 통해 독점하는 사태까지 우려되고 있었다. 워크스테이션 업체들이 확보해 놓은 220V 전용 모니터가 7월이면 바닥을 드러낼 추세였는데, 히타치 등 여타 외국제품은 수입이 불가능하거나 가격이 적절치 못했으며, 국산제품에 대해서는 아직 품질을 자신하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즉 “소니 트리니트론 외에 대안 없다”였다.

220V 전용 제품 확보작업을 진행하고 있던 이들 업체들은 별다른 대안이 없다는 판단에 따라 소니 제품 수입을 검토하거나 추진하고 있었다. 특히, 삼성HP는 재고물량이 거의 바닥나 공급에 차질을 빚던 상태로, 수입 관련 절차를 줄이는 등 소니로부터 최대한 빠르게 제품을 들여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당시 국내 워크스테이션 시장에서 ‘스팍’ 제품으로 가장 높은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던 한국썬마이크로시스템즈도 소니로부터 220V 전용 20인치 트리니트론 모니터를 OEM으로 공급받아 사용키로 했으며, 금성사 · 삼보마이크로시스템즈 · 현대전자 등 ‘스팍’ 호환기종을 공급하고 있던 국내 업체들 역시 대부분의 자사 제품에 한국썬마이크로시스템즈로부터 구입한 트리니트론 모니터를 장착하고 있었다. 한때 220V 전용 모니터 공급을 위한 대안으로 삼성전자의 싱크마스터를 검토해보기도 했던 한국디지탈도 품질 우려를 사유로 19인치 트리니트론 모니터를 계속 사용하고 있었다. 그 외 한국IBM과 한국실리콘그래픽스 등 주요업체들 또한 트리니트론 모니터 수입을 추진, 국내 고성능 모니터의 90% 이상이 소니 상표를 달게 될 판이었다.

이례적으로 롯데전자는 자사 워크스테이션 제품에 삼성전자의 싱크마스터 모니터를 사용해 주목을 받았다. 당시 롯데전자의 한 관계자는 “싱크마스터와 일본 히타치 제품의 성능을 비교한 결과 국산 제품이 더 우수하다는 결론이 나와 삼성 제품을 사용키로 했다”고 밝혔다.

 

그 후 20년, 엇갈린 명암

▲ CES 2014에서 미국 ICT미디어 HD구루로부터 ‘베스트 인 쇼’에 선정된 삼성 105인치 커브드 UHD TV

시장조사기관 IDC의 2013년 10월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2분기 세계 PC 모니터 시장에서 삼성전자는 442만대를 출하해 점유율 12.6%를 차지, 501만대를 출하해 점유율 14.9%를 차지한 미국 PC 제조사 델에게 자리를 내주며 연속 1위 기록을 27분기로 마감했다. 20년 전 소니의 트리니트론 모니터를 공급받으려 애썼던 삼성은 근래 약 7년간 세계 모니터 시장의 최상부에 위치했고, LG 역시 세계적인 브랜드로 거듭났다.

트리니트론 브라운관이 명성을 떨쳤던 TV 시장에서도 소니의 아성은 무너지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NPD디스플레이서치의 지난 2월 발표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세계 평판TV 시장에서 8년 연속으로 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으며, 차세대 격전지로 부상하고 있는 UHD TV 시장에서도 세계 점유율 1위 소니를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유럽 시장에서는 지난해 4분기에 출시 3개월 만에, 북미 시장에서도 올 1분기에 출시 5개월 만에 소니를 제치고 UHD TV 시장 점유율 선두에 올랐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지난 1월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가전 전시회 CES 2014에서 TV로 각종 수상을 거두며 주목을 받았고, 소니는 지난 2월에 9년 연속 적자를 낸 TV 사업부를 분사하는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소니는 이와 더불어 PC 사업부도 일본산업파트너스(JIP)에게 매각했다. 2000년대 초 스티브 잡스가 직접 나서서 맥OS를 탑재시키고 싶어 했었던 바이오(VAIO) 노트북에서 소니의 이름은 사라지게 됐고, 이제 트리니트론이 남긴 자취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지 모른다.

▲ 이제는 바이오 노트북에서 소니의 이름을 볼 수 없다

 

소니의 갈라파고스

▲ CD와 MP3 사이에서 사라져간 MD

태평양의 갈라파고스 제도는 대륙에서 떨어져 있어 독자적인 생물 진화체계를 갖춘 곳으로, 다윈의 진화론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아울러, 자신들의 표준만 고집하다가 세계 시장에서 고립되는 경제 현상을 일컫는데도 쓰인다.

지난 1월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의 대외 신용등급 평가에서 투자 부적격으로까지 추락하며 흔들리고 있는 소니. 장기간의 엔고현상, 추격을 방치한 자체 기술력에 대한 과신, 미디어 및 콘텐츠 분야를 비롯한 과다한 분산 투자 등 소니가 위기를 맞게 된 이유에 대해 다양한 분석도 오가고 있다. 그 중 빠지지 않고 거론되는 요인은 세계 시장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점이다. TV와 휴대폰에서 소니는 현재에 안주해 세계 시장이 LCD와 스마트폰으로 재편되는 흐름에 한발 늦었고, 결국 뒤쳐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세계 시장의 흐름과 달리 독자적인 표준을 무리하게 추진해온 점 역시 유사한 맥락의 패인이라고 볼 수 있다. 자체 기술력을 전제로 국제 표준과 부가 수익을 노리는 도전은 지속적인 가치 창출을 위해 시도해볼만한 일이었으나, 대개의 경우 소니의 시장 오판 및 정책의 실패로써 대중화를 이루지 못했고, 그로부터 세계의 흐름에 도태됐을 시 과감하게 전용 규격을 포기하지 못했던 게 이후 손해를 불러오는 주범이었다.

소니의 이러한 ‘갈라파고스’ 제품으로는 베타맥스, MD, UMD 등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베타맥스로는 당시 VHS가 잠식했던 상황에서 볼 수 있는 비디오가 한정적이었고, MD는 90년대 후반에 종종 쓰였으나 MP3 플레이어가 보급되면서 이내 사라져갔다. 스티브 잡스도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했던 UMD는 이제 PSP에서조차 없어졌다.

계열사 간, 부서 간 소통과 협업이 부족했던 점 역시 작금의 위기를 초래한 주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개방성과 창의성이 새로이 주요 덕목으로 대두되던 시점에, 관료적인 조직 내에 만연했던 오만과 아집은 끝내 그들의 발목을 잡았다. 그들은 그들끼리도 ‘갈라파고스’를 만들었던 것이다.

 

절치부심, 워크맨의 신화는 재현될까

▲ 통신3사 영업정지로 국내 출시가 잠정 연기된 엑스페리아Z2

소니는 2013년 회계연도(2013년 4월~2014년 3월)에서 1,100억 엔(약 1조 1,600억 원)의 순손실이 예상되고 있다. 이에 따라, 지난 2월 6일 PC 사업 매각 및 TV 사업 분사를 발표하면서 전 세계 5,000명 규모의 인력 감축을 예고했다. 지난해 미국 본사 사옥을 처분한 데 이어, 올해 들어 미국 20여 곳의 유통 매장도 정리 중이다. 최근에는 창업터전이자 약 60년간 영욕을 함께했던 도쿄 고텐야마의 구 본사 사옥까지 매각에 나섰다. 수세에 몰리자 벌이는 궁여지책일 뿐이라는 시선도 있지만, 말 그대로 속을 삭히며 이를 갈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소니는 구조조정을 통해 스마트폰, 게임기, 이미지센서를 새로운 3대 동력으로 삼겠다고 천명했다. 소니의 히라이 가즈오 사장은 지난 2월 “미국과 중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해 스마트폰의 세계 판매량을 2년간 2배로 늘리겠다”고 공언했고, 모바일 사업에 중점을 두겠다고 밝혔다. 이에 전략 스마트폰 ‘엑스페리아Z2’를 3월말에서 4월초까지 전 세계에 순차적으로 출시하며 전장에 뛰어든다. 소니는 5.2인치 디스플레이, 2,070만 화소 카메라, 4K 해상도 동영상 녹화, 주변 소음 제거 기능, 생활 방수·방진 등으로 무장한 ‘엑스페리아Z2’가 다방면에서 쌓아온 자사의 역량을 집약시킨 제품이라며 자신감을 내비쳤다. 아울러 ‘엑스페리아Z2 태블릿’은 4월 4일 출시를 준비 중이다.

소니는 차세대 모바일 산업으로 떠오르고 있는 웨어러블 기기 시장에도 적극적으로 다가서고 있다. CES 2014와 MWC 2014에서도 사용자의 일상을 기록해주는 ‘스마트밴드’와 프리즘 디스플레이를 내장한 ‘스마트아이글래스’를 선보이며, 기술력에 기반 한 특유의 감각과 디자인은 여전히 건재함을 시위했다.

스티브 잡스가 생전에 즐겨 입었던 터틀넥 셔츠와 청바지 조합은 소니 공장 근로자들의 작업복이었다. 그는 소니로부터 많은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바 있다. 절치부심하며 다이어트 중인 가전 업계의 거인이 워크맨의 혁신을 재현해 다시금 일어설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 스마트밴드, 스마트아이글래스

저작권자 © 컴퓨터월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