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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산업 20년 전] ‘슈퍼컴퓨터’ 개발사업의 전신, ‘타이컴’을 돌아보다1996년-국내 대형컴퓨터 시장의 국산화 위한 ‘주전산기 개발사업’ / 2016년-미래부 HPC사업단 발족…IT기반 다지기 위해 슈퍼컴퓨터 개발 추진

   
 
[컴퓨터월드] 80년대 중판, 국내 대형컴퓨터 시장은 모두 IBM 등 글로벌 기업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글로벌 기업들에 대항하고 국가 기술력을 강화하고자 추진됐던 것이 바로 국산 주전산기 개발사업이다. 국산 주전산기 개발사업은 9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추진돼 세 번때 기종까지 상용화를 완료했고, 관련 기술 확보나 인력 양성 측면에서도 높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실제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주전산기의 성능과 부족한 판매량에 의해 개발사들은 지속적인 사업 참여를 주저하게 됐다. 비슷한 시기에 WTO 출범으로 인해 그동안 내수시장에서 갖던 비교우위가 사라지자, 주전산기 개발사업은 결국 후속 기종 개발이 무산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2016년, 구글의 ‘알파고’ 열풍으로 IT 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미래창조과학부는 국산 슈퍼컴퓨터 개발을 목표로 하는 HPC사업단을 발족하고, 향후 10년간 1천억 원의 예산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외산 일색인 슈퍼컴퓨터 시장을 국산화하고 앞으로 다가올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하기 위한 기반기술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우려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일각에서는 ‘알파고’의 인기에 편승한 전시 행정병이라 비난하기도 한다.

골로벌 기업 독점시장의 국산화, 미래를 대비한 기반기술 확보, 서로 같은 목적을 위해 개발됐던 ‘타이컴’을 통해 현재의 HPC사업단을 진단해본다.

   
▲ 주전산기 개발사업 연표

글로벌 벤더 독점의 대항마, 국산 주전산기 개발사업

8~90년대의 국내 대형컴퓨터 시장은 IBM과 유니시스(Unisys) 등 글로벌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IBM은 90년대 초반까지 일반, 공공, 연구, 금융 등 분야를 가리지 않고 국내 대형컴퓨터 시장의 절반가량을 차지하여 사실상 독점과 다름없는 체제를 구축했다. 이를 통해 다른 운영체제와의 상호 호환성이 낮아 기종 교체가 어려웠던 폐쇄적 환경을 빌미로 자사의 대형컴퓨터를 도입한 기관에게서 폭리를 취했다. 90년대 이후 유닉스(Unix) 운영체제를 갖춘 컴퓨터를 도입해 기존의 폐쇄적인 전산 시스템을 클라이언트/서버 기반의 시스템으로 교체하고자 하는 흐름이 일었으나, 결과적으로 유닉스 컴퓨터의 판매량이 급증하였을 뿐 글로벌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던 시장 구조를 바꾸지는 못했다.

독점 체제를 구축한 글로벌 기업들은 시스템 확장을 위한 대형컴퓨터 추가 구입이나 디스크 등 소모품 구입에 일반적으로 납득되지 않는 높은 가격을 붙이는가 하면, 빈번히 발생하는 시스템 장애에도 미흡한 대처를 보여주는 등 사후 서비스 제공 측면에서도 부족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며 겨자 먹기로 글로벌 기업의 제품을 도입해야만 했던 것은 이를 대체할 만한 국산 제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글로벌 기업의 대형컴퓨터 시장 독점에 대항하기 위해 상공부와 체신부, 과학기술처가 나서서 추진한 것이 바로 국산 주전산기 개발사업이었다. 80년대 중반부터 논의된 주전산기 개발사업에는 수백억 원 규모의 국가 예산과 국내 최고 수준의 인력이 투입됐다.

이렇게 정부와 국내 기업들이 힘을 모은 결과 마침내 사업 착수 5년 만에 국산 중형컴퓨터 주전산기Ⅰ과 국산 운영체제 ‘K-DOS’를 발표하며 가시적인 성과를 거뒀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상공부 등은 이후 주전산기 개발사업에 더욱 박차를 가해 후속 모델이자 ‘타이컴’이라고 불리던 주전산기Ⅱ 개발에 착수했고, 마침내 96년도에 이르러서는 민간기업의 주도로 개발된 주전산기Ⅲ까지 상용화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많은 업계 관계자들은 국산 주전산기의 개발을 통해 글로벌 기업의 독점체제에 대항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글로벌 기업의 제품을 사용하는 국내 기업들에게 확실한 대안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96년 초에 주전산기Ⅲ가 상용화 된 직후, 개발을 담당했던 4개 회사(삼성, LG, 대우, 현대)들은 후속 모델인 주전산기Ⅳ의 개발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승승장구하는 것만 같았던 국산 주전산기 개발사업에서 개발사들이 발을 빼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애물단지 신세가 된 주전산기

본지 146호(96년 11월호)에 따르면 주전산기 개발사업 10년차인 96년 11월초까지 국내에 공급된 주전산기는 Ⅰ이 242대, Ⅱ가 712대, Ⅲ가 49대로 모두 합쳐 1천여 대에 달했다. 개발기간을 차치하더라도 연간 1백여 대가 판매됐다. 그러나 주전산기 개발사업이 수백억의 예산이 투자돼 국내 최고의 기술력을 자랑하는 4개 기업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고려한다면, 이는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이었다.

판매량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다보니 개발비 회수 역시 난항을 겪었다. 판매량과 개발비를 통해 역산해보면, 당시 글로벌 기업의 제품들은 제품 한 대당 개발비가 약 4백만 원 꼴이었던데 비해 국산 주전산기는 한 대당 약 1억 3천만 원에 달했다. 국산 주전산기 개발과 상용화를 담당했던 4개 업체는 각자가 판매한 주전산기 한 대당 약 5천만 원의 손해가 났다고 밝혔다. 제품 개발비에만 400억 원 이상을 투자했지만 판매 부진으로 투자비를 회수할 수 없었다.

국산 주전산기의 주요 판매처 역시 논란이 됐다. 93년도 한 해 동안 국산 주전산기 수요는 공공기관이 전체의 67%를 차지했지만, 일반 기업과 금융기관 등은 각각 8%, 3%에 머물렀다. 특히 96년에 공급되기 시작한 주전산기Ⅲ는 일반 기업과 금융권에 고작 1대씩만 공급돼, 글로벌 기업과의 경쟁에서 대항마로 내세우기 부족하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즉, 정부와 공공기관이 국산 주전산기 도입을 장려하고 그에 따른 특혜를 줬기 때문에 그나마 시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지, 자유경쟁체제에서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을 하기에는 부족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모 개발업체 관계자는 “주전산기Ⅲ는 가격대비 성능에서 결코 뒤지는 제품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면서도, “국산 주전산기의 성능이 외산 유명기종에 비해 다소 뒤떨어지는 것은 사실”이라고 시인했다. 가격대비 성능은 충분하더라도 절대적인 성능에서는 뒤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노력과 예산에 비해 부족한 판매량, 이로 인해 회수되지 않는 투자비, 정부의 비호 없이는 판매처를 찾기 힘든 시장,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능 등이 맞물려 국산 주전산기는 그야말로 비싼 값을 치른 애물단지 신세가 되었다.

   
▲ 96년의 주전산기 기관별 판매량

WTO 출범과 정부 보조 중단

96년의 주전산기Ⅲ 상용화 이후, 세계무역기구(World Trade Organization, 이하 WTO)의 출범에 따라 그렇지 않아도 순탄치 않았던 국산 주전산기 개발사업에 한층 더 암운이 드리워졌다. WTO 출범으로 국산 주전산기의 판매를 촉진하기 위해 공공기관의 수요를 몰아주던 정책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제 판매처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기업들과 같은 선상에서 공정한 경쟁을 거쳐야만 했다. 이는 국산 주전산기가 글로벌 기업들과 완전한 자유경쟁 체재 하에서 싸우기에는 부족하다는 점과 맞물려, 국산 주전산기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국방부가 산하 부대에 외산 기종 도입 시 국방부 심의를 받으라는 지침을 내려 우회적으로 국산 기종을 우선하거나, 국민은행이 금융권에서 유일하게 국산 기종을 도입하는 등 국산 주전산기에 대한 지지가 잇달았다. 그러나 WTO 체제에 발맞추어 글로벌 기업에게 문호를 개방하는 사례도 얼마든지 있었다. 서울시는 전산장비 도입 시 국산과 외산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밝혔다. 서울시를 선례로 하여 여타 지방자치단체나 공공기관 등에서도 글로벌 기업 제품과의 경쟁이 불가피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국산 주전산기 도입에 따른 경제적 지원 역시 끊길 예정이었다. 그동안 국산 주전산기 보급을 늘리기 위해 250억 원 규모의 정보통신진흥기금을 조성하고 연 6.5%의 저리로 융자해주고 있었는데, 이것 역시 WTO에서 금지보조금으로 규정돼 운용이 제한된 것이다. 이처럼 자유로운 무역 환경을 조성하고자 하는 국제적 흐름에 맞춰 국산 주전산기를 지켜주던 정치•경제적 보호막이 하나씩 벗겨지고 있었다.

관련업계에서는 국산 주전산기의 향후 전망이 이처럼 어두운 데도 뒷짐만 지고 있는 정부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특히 정보화산업 발전을 위해 힘써야 할 정보화촉진위원회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정보화촉진위원회의 전신인 전산망조정위원회는 주전산기Ⅰ, Ⅱ 상용화 당시에 부처 간 이해관계를 조율해 공급처를 확보하는 등 국산 주전산기 보급을 위해 노력했었는데, 이후의 정보화촉진위원회로 바뀐 뒤에는 주전산기Ⅲ의 보급 등에 손을 놓아버린 채 그저 지켜만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업계 관계자들은 정부가 국가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정보산업을 키워야한다고 목소리만 높여 놓고는, 정작 시간이 지나 환경이 변하고 WTO라는 국제적 흐름이 다가오자 속절없이 휩쓸리고 있을 뿐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국가 경쟁력 확보라는 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기업들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 게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공공기관 특화와 사후지원 확대로 차별화 시도

이처럼 시장이 불리하게 흘러갔지만, 주전산기 개발을 담당한 4개 업체들은 그래도 아직 회생 가능성이 남아있다는 전망을 내놓았다. 비록 후속 모델인 주전산기Ⅳ 개발에는 회의적이었지만, 이미 개발과 상용화를 마친 주전산기Ⅲ는 활용하기에 따라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개발업체들은 글로벌 기업들의 제품이 표기 성능과 달리 실제 현장에서의 가동률은 4~50%에 그친다며, 80% 이상의 가동률을 보이는 국산 주전산기가 유리한 부분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외산과 비슷한 수준의 안정성을 갖췄으면서도 국내 고객의 요청에 즉각적인 대응이 가능한 국산 주전산기가 사후 지원 면에서도 유리하며, 국내 실정에 맞춘 사용자의 요구사항에도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다는 점을 내세웠다.

이러한 장점을 바탕으로 개발업체들은 신뢰성과 장애복구성을 대폭 강화하는 한편, 국내 환경에 맞는 정부행정기관 소프트웨어를 개발하여 탑재하겠다고 밝혔다. 향후 글로벌 기업과의 경쟁이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기 위해 무리한 경쟁을 벌이기보다는 이미 어느 정도 시장을 확보한 공공기관들을 상대로 안정적인 공급처를 확보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이를 위해 개발업체들은 정부 측에 두 가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첫 번째는 국산 주전산기의 판매단가 검토였다. 국산 주전산기 개발사업에는 개발업체 측에서도 수백억 원의 금액이 투자됐고, 이 투자비를 회수하기에는 당시 국산 주전산기의 조달단가가 터무니없이 낮았기 때문이었다. 개발업체들은 주전산기는 여타 공산품과는 달리 수준 높은 기술력과 노하우가 있어야 개발할 수 있는데다, 대량생산이 아닌 주문생산으로 제작되는 특수성을 고려해 어느 정도의 가격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주전산기 판매 시 주변기기나 소프트웨어에도 충분한 가격을 책정해줄 것을 요구했다. 가령 주전산기와 프린터 등의 주변기기를 함께 판매할 경우, 주변기기는 시중가의 6~70%만 인정하는 입찰관행으로 인해 공급사가 손해를 떠안아야했다. 이는 소프트웨어 측면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당시 DB업체들이 고객에게 평균 12%의 유지보수료를 청구하던 반면, 정부에서는 6~7%의 유지보수료만을 인정해주기 때문에 이 역시 나머지 5~6%의 손해는 공급사측에서 전부 떠안아야 했다. 공급업체들은 이러한 잘못된 관행을 지적하며, 국산 주전산기 시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선 적절한 가격이 담보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두 번째 요구사항은 안정적인 공급처의 확보였다. 이는 완전히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달라는 것이 아니라, 기존에 국산 주전산기를 도입한 시장만큼은 꾸준히 유지될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는 것이었다. WTO 체제 하에서 글로벌 기업과의 경쟁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이미 시장을 확보하고 전용 소프트웨어의 개발을 진행 중인 공공기관 쪽에서라면 어느 정도 승산이 있을 거라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당시 국산 주전산기가 확보한 공공기관 시장은 결코 작지 않았다. 88년부터 행정전산망용으로 공급된 240여 대 가운데 150여 대가 교체 혹은 업그레이드를 필요로 했고, 지방행정전산화 구축사업을 통해 보급된 712대의 주전산기Ⅱ 역시 향후 최신 기종으로 업그레이드를 고려해야했다. 이외 교육기관 및 통신사업자 등 기존의 국산 주전산기 시장까지 감안한다면 연간 300대 정도의 시장은 꾸준히 확보될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있었다.

그러나 주전산기Ⅲ를 살려보려는 개발업체들의 구체적인 요구에도 불구하고 정부 측에서는 도움을 줄 수 없다고 답변했다. 정보통신부의 한 관계자는 “개발 4사의 어려움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정부로서도 방법이 없다”고 털어놓았다. 정부 입장에서도 WTO가 출범되고 국제 무역에서 자국 기업만의 이익을 수비하려는 시도가 금지됨에 따라 나설 수 있는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부는 공급처 확보와 같은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고, 산업 전반의 정보화 수요를 늘려 개발업체들이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늘리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또한 적극적으로 최신기술 도입과 인력 양성을 지원해 국내 업체들의 기술향상을 노리겠다고 했다. 국제적 흐름에 따라 정부의 비호를 기대할 수 없는 이상, 많은 기회가 보장되는 시장과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기술력을 키우는 것이 정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던 셈이다.


2016년 HPC사업단 출범, 슈퍼컴퓨터의 국산화 기대

일각에서는 주전산기 개발사업을 통해 글로벌 기업들과의 기술격차를 줄였으니 충분한 성과를 거뒀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당시 주전산기 개발에 참여해 최신 기술을 익힌 삼성과 LG 등의 기업들은 그 기술력을 바탕으로 하여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업체로 성장했다. 그러나 주전산기 개발사업을 단순히 IT 기술력 확보를 위한 것이었다고 치부해 버린다면, 정부와 국내 기업들은 아주 비싼 수업료를 치른 셈이다.

결과적으로 주전산기 개발사업은 실패했다. 개발을 완료한 국산 주전산기는 국제 시장의 흐름과 글로벌 기업들의 제품들에게 밀려 애물단지가 되었고, 판세를 뒤집을 후속기종도 개발되지 못했다. 글로벌 기업에게 독점된 분야에 대항하고 기술력을 확보한다는 명분을 갖추었음에도 투자 대비 실익이 나지 않는다고 판단되자 프로젝트 자체가 중단됐다. 주전산기 개발사업을 통해 관련기술 축적과 연간 200명에 달하는 전문 인력을 양성했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단발성으로 그쳤기에 결국 안정적인 인재풀을 꾸준히 형성하지 못했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국산화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주전산기 ‘타이컴’은 20년이 지난 오늘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고 말았다.

주전산기 개발사업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국산 고성능 컴퓨터를 개발하려는 시도는 정부와 민간 양측에서 꾸준히 진행돼왔다. 95년 5월에는 상공자원부와 서울대 컴퓨터신기술사업단이 협력하여 국산 서버 컴퓨터인 엔터프라이즈Ⅰ 개발에 착수했다. 3년간 167억 원의 예산을 투자하여 나름대로의 소득은 얻었으나 결국 시장 출시에는 실패해 아쉬움을 남겼다.

2000년대 이후로는 이러한 노력들이 일원화된 정책 없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는데, 서울대 매니코어 프로그래밍 연구단의 주도로 개발된 슈퍼컴퓨터 ‘천둥’이 대표적이다. 2012년 개발이 완료된 ‘천둥’은 106.8TFlops(테라플롭스, 1TFlops는 초당 1×번 연산가능)의 연산성능을 지녔고, 2012년 11월의 세계 슈퍼컴퓨터 학술대회(이하 ISC 2012)에서 전 세계 슈퍼컴퓨터들을 상대로 Top500 리스트에서 277위, Green500 리스트에서 32위에 등재되어 성능을 인정받았다.

   
▲ 국산 슈퍼컴퓨터 천둥

지난 4월, 미래창조과학부(이하 미래부)는 국산 슈퍼컴퓨터 개발을 골자로 하는 ‘초고성능컴퓨팅 사업단’(이하 HPC사업단)의 출범을 공식 선언했다. 미래부는 HPC사업단을 통해 ICT분야 첨단기술의 결정체인 슈퍼컴퓨터 개발에 연간 100억 원씩 10년간 투자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를 통해 기반기술과 최고급 인재풀을 확보하겠다고 밝혔다.

일반적으로 주전산기나 슈퍼컴퓨터 등의 고성능컴퓨터 개발기술은 5년 후에 일반PC, 10년 후에는 모바일 기기로 파급되는 경향이 있다. 삼성과 LG가 지금의 스마트폰 시장에서 입지를 확보하고 있는 것도 주전산기 개발사업의 한 축을 맡아 고성능컴퓨터 개발을 진행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전산기 개발사업이 삼성과 LG의 모바일 산업의 근간을 이룬 것처럼, HPC사업단의 슈퍼컴퓨터 개발 역시 미래 먹거리 산업을 형성하고 견인할 수 있으리라는 계산이다.

또한 글로벌 기업들이 독점하고 있는 국내 시장에 국산 대항마를 내세우겠다는 의도도 있다. 미래부가 밝힌 바에 따르면 ‘천둥’과 같은 국산 슈퍼컴퓨터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글로벌 기업의 제품과 비교하면 그 성능이 부족하며, 2016년 4월을 기준으로 국내 초고성능컴퓨팅 시장의 95%는 글로벌 기업의 제품이 차지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 기업들은 초고성능컴퓨팅 분야에 투자하거나 기술력을 갖춰 경쟁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기업들의 투자가 위축되다보니 자연히 대학을 졸업한 우수한 인재들 역시 현장에서 역량을 키울 기회를 얻기가 힘든 실정이다.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미래부는 슈퍼컴퓨터 개발을 국가 차원에서 주도하여 국내 투자 유치와 기술력 확보, 인재 양성 등을 동시에 잡겠다고 선언한 셈이다.

미래부는 HPC사업단의 출범과 함께 슈퍼컴퓨터 개발의 세 가지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했다. 현재 운용되고 있는 제품의 1/4 수준의 낮은 전력 소모와, 국내 실정에 맞춘 1PFlops(페타플롭스, 1PFlops는 초당 1×번 연산가능) 규모의 성능을 갖추되 향후 5~10PFlops까지 확장이 가능해야하고, 마지막으로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통합된 완성형 시스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성능 면에 있어서는 2020년까지 1PFlops 이상의 슈퍼컴퓨터를 개발하고, 2025년까지는 30PFlops까지 성능을 끌어올리겠다고 밝혔다.

이는 2015년에 시행한 재난·환경 분야의 조사결과에 기반을 둔 것으로, 국내의 슈퍼컴퓨터 실수요는 해양정보/산불/산사태 등의 예측에 목적을 둔 1PFlops 정도에 집중돼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1PFlops 성능의 슈퍼컴퓨터 개발을 우선해 수요층을 확보하고, 이후 장기적인 안목에서 규모를 늘려나가겠다는 전략으로 보인다.

   
▲ HPC사업단의 슈퍼컴퓨터 개발 로드맵

시장, 성능, 예산…현실성 논란에 휘말린 초고성능컴퓨터 개발

그러나 HPC사업단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HPC사업단 출범이 발표되자마자 업계 일각에서는 전형적인 보여주기식 행정에 지나지 않는다며 비난하는 목소리가 일어났다. 미래를 내다보고 한 발 앞서 준비하는 게 아니라, 구글의 ‘알파고’등으로 인해 생겨난 IT붐에 편승해 본인들의 실적만 부풀리려 한다는 주장이다.

사실 초고성능컴퓨터 분야에 있어 우리나라는 매우 작은 시장을 가지고 있다. 미래부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초고성능컴퓨터로 널리 사용되는 x86서버를 기준으로 국내 시장은 2600억 원 규모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글로벌 시장의 2.6%에 불과한 수치이며, 연평균 성장률도 0.98%라는 낮은 수치를 보여 성장이 정체되고 있다.

IDC(International Data corporation)의 2014~2015년 발표에 따르면 글로벌 시장에서 초고성능컴퓨터 업계의 성장률은 연평균 7.8%라는 수치를 보이고 있고. 그 중에서도 서버 분야는 연 평균 8.5%의 가파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정체된 국내 시장과는 판이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국내 시장의 규모 자체도 작지만, 국내 시장의 실수요를 예상하고 5년 내에 1PFlops의 슈퍼컴퓨터를 개발하겠다는 것도 현실성이 부족하다. 현재 국내 슈퍼컴퓨터 중 가장 뛰어난 성능을 가지고 있는 것은 2015년에 도입한 기상청의 슈퍼컴퓨터 4호기 ‘미리’와 ‘누리’이다. 이들은 같은 시기에 도입돼 2.39PFlops의 성능을 보여줬고, ISC 2016의 Top500 리스트에서 각각 36위와 37위에 랭크돼 있다. 그리고 해당 시점으로부터 5년 전, 2010년에 기상청이 도입한 ‘해온’과 ‘해담’은 0.31PFlops의 성능을 보여주었다. ‘해온’과 ‘해담’도 도입 당시에는 ISC 2010에서 Top500의 20위권에 랭크된 최고 수준의 슈퍼컴퓨터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5년 사이에 기상청이 도입한 슈퍼컴퓨터들 간에도 약 8배에 달하는 성능 차이가 나고 있는 것이다.

   
▲ 기상청이 보유한 슈퍼컴퓨터 4호기

이를 통해 세계시장의 슈퍼컴퓨터 기술이 매년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그만큼 국내 시장의 요구 수준도 높아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을 무시한 채 1PFlops 성능의 슈퍼컴퓨터를 목표로 시간과 예산을 투자한다면, 정작 5년 후에 개발된 1PFlops 슈퍼컴퓨터로는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환경에 직면할 것이다.
부족한 예산지원 역시 지적됐다. 미래부는 매년 100억 원의 예산을 10년간 지원하여 총 1,000억 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는 최첨단 산업인 슈퍼컴퓨터 개발을 견인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알파고’를 통해 인공지능(AI) 붐을 일으킨 구글은 지난 14년간 인공지능 사업에 280억 달러(약 32조 원)를 투자해왔다. 중국의 바이두 역시 실리콘밸리에 인공지능연구소를 설립하여 3억 달러(약 3400억 원)를 투자했고, 지난 1월에는 일본의 도요타가 인공지능 연구를 목적으로 ‘도요타 리서치 인스티튜트(Toyota Research Institute)’를 설립해 10억 달러(약 1조 1100억 원)를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심지어 86년 중반에 시행되었던 주전산기 개발사업 조차 10년간 투자한 개발비용이 630억 원에 달한다. 이에 업계 일각에서는 HPC사업단의 연봉만 지급하다가 제대로 된 결과도 내지 못한 채 예산만 낭비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 우려하고 있다.


2016년에 맞춘 새로운 “주전산기 개발사업”

20년 전의 주전산기 개발사업은 글로벌 기업들에게 잠식당한 국내 대형컴퓨터 시장에 국산 대항마를 내세우자는 의도에서 시작됐다. 국산 주전산기라는 대체재가 생긴 국내 시장은 독점적 지위를 믿고 막무가내로 사업을 벌이던 글로벌 기업들에게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또한 주전산기 개발사업에 참여한 업체들은 국책사업을 함께 진행하며 확보한 기술력으로 이후 IT 산업의 선두주자로 발돋움했으며, 수준 높은 기술력을 가진 인재들이 양성돼 산업 발전의 토대를 다졌다.

그러나 실익을 내지 못한다는 이유로 사업은 중단되었고, 타이컴이라는 이름도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갔다. 주전산기 개발사업을 통해 얻은 것도 많지만 그만큼 비싼 수업료를 지불해야 했으며, 이후 명맥을 유지해 줄 만한 다른 사업으로 이어지지 못하여 고급 인력 양성 역시 중단되고 말았다.

국가 기술력을 확보하고 글로벌 기업들의 시장잠식에 대항하기 위해, 국책 사업을 선정해 국력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선택과 집중이 이루어지지 못하면 힘이 낭비되기 마련이므로, 정부가 명확한 방향성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예산 지원이 이루어지면 향후 해당 업계의 자체적인 투자 유치나 인재 양성 역시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20년 전의 주전산기 개발사업에서 배웠듯, 아무리 합리적인 명분이 있어도 결과적으로 실익을 내지 못하면 장기적인 사업 추진은 어렵다. 그러므로 국책 사업을 선정할 때에는 허울 좋은 명분만을 내세워 현실성이 확보되지 않은 사업을 추진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미래부의 HPC사업단 발족이 정말 미래를 내다보는 장기적인 안목에서 나온 것인지, 그저 ‘알파고’ 이후 IT 기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이에 편승한 전시행정일지는 HPC사업단의 향후 행보를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과 IT 기술에 대한 관심이 더없이 높아진 오늘날, 국산 주전산기 개발사업에 이은 국산 슈퍼컴퓨터 개발사업이 올바른 방향을 찾아갈 수 있을지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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