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유통 분야 주 수요처로 떠올라, 시장 선점 위해 업체 간 경쟁 치열

[컴퓨터월드] 2002년, 전자화폐 업체들의 공통된 목표는 많은 단말기와 카드를 배포해 사용하는 사람과 사용할 수 있는 곳을 늘리는 것이었다. 이들 전자화폐 업체들은 당초 2001년 상용 서비스를 공언했지만 전자화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다 인프라 구축도 되지 않아 목표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전자화폐 업체들은 2002년을 전자화폐 상용서비스의 원년으로 만들겠다는 각오로 다양한 기술과 마케팅 전략을 내놓았다.

 

출시한 지 2년째 여전한 적응기

2002년, 전자화폐가 국내에 공개된지 2년이 지났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전자화폐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전자화폐와 신용카드의 차이를 구별하지 못한 경우는 물론 심지어 제휴카드를 사용하는 사람조차도 자기 카드에 전자화폐 기능이 있는 줄 모르는 경우도 많았다. 그만큼 전자화폐에 대한 인식이 낮았던 것으로 소비자들에게 전자화폐에 대한 정보를 알리는 것이 전자화폐 업계의 가장 큰 과제였다.

전자화폐는 형태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IC카드에 기반한 실물형 전자화폐와 네트워크에 기반한 온라인형 전자화폐이다. 일반적으로 전자화폐라고 하면 실물형 전자화폐를 의미했다. 네트워크에 기반한 전자화폐는 인터넷상 주거래은행에서 지정한 가상지갑에 전자화폐를 예치했다가 대금 결제에 사용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전자화폐가 주목을 받았던 이유는 스마트카드의 출현과 온·오프라인의 소액 결제 확대, 암호 기술의 발전 때문이었다. 전자화폐는 초기에 단순히 은행 계좌 정보나 신원확인용 개인정보 등을 담기 시작하다가, 점점 신용카드의 기능을 추가하며 주민등록이나 의료보험 등 다양한 방면에 이용할 수 있게 됐다. 카드 한 장으로 버스도 타고, 지하철도 타고, 자판기도 이용하고, 문도 열고 하는 그야말로 스마트(Smart)한 카드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인터넷 환경의 일반화로 온라인 환경에서 유료 콘텐츠의 사용이 증가한 것도 전자화폐가 발달한 이유 중 하나였다. 당시 아바타의 옷을 갈아입히거나, 벨소리를 다운받거나, 영화·만화를 보는 등 다양한 유료 콘텐츠의 가격이 소액이었기 때문에 사용료보다 이용 수수료가 더 많이 발생하는 일이 생겼다. 이런 시장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화폐로 전자화폐가 주목받았던 것이다.


익명성과 지출 계획성이 장점

전자화폐는 익명성을 방지하고 지출 계획성을 갖출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을 받았다. 실제 현금은 기록이 남지 않아 지출 계획을 세우는 데 한계가 있었다. 신용카드는 기록이 남기는 하지만 후불정산이기 때문에 계획에 없는 지출이 발생할 여지가 많았다. 반면 전자화폐는 자신이 충전한 범위 안에서만 사용하기 때문에 계획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뜻밖의 지출을 방지할 수 있었다.

직불카드와 전자화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이나 정산방식은 달랐다. 직불카드는 직불카드를 받는 업소들이 그 카드를 발행한 은행을 통해서만 대금을 결제 받을 수 있었지만, 전자화폐는 모든 은행과 거래를 할 수 있다는 차이가 있었다.


전자화폐의 기반시설 확보

전자화폐가 현금을 대체하면서 일반화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금보다 유용하다’는 소비자 인식이 중요했다. 1999~2000년만 하더라도 신용카드로 계산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2년이 지난 2002년에는 모든 장소에서 신용카드 결제가 당연시 될 정도로 사용처와 사용자가 늘어났다.

전자화폐 업계는 처음 교통과 유통, 온라인 결제 부문에서 사용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이 시장 공략에 힘을 쏟았다. 버스, 지하철, 택시 등 대중교통수단의 요금과, 패스트푸드점이나 커피숍 등에서 사용하는 소액 비용, 인터넷상에서 각종 유료 콘텐츠 비용을 전자화폐로 결제할 경우 소비자의 저항감 없이 편리성이 크게 높아질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전자화폐 사용을 늘리기 위해서는 또한 단말기를 설치한 가맹점을 많이 확보해야 했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유통분야의 경우 단말기 설치 비용은 약 40만 원으로 비용 부담이 큰 편은 아니었지만, 교통 분야의 경우 장비 한 대 가격이 150만 원에 달하는 데다 해당 지역 행정기관의 허가를 받아야하는 등 어려움이 많았다.


1996년부터 전자화폐 논의 시작

국내에서 전자화폐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90년대 중반부터다. 1996년 금융정보화추진분과위원회에서 금융기관 공동의 전자화폐 도입을 결의했다. 이후 1998년에서 2000년까지 K-캐시를 비롯하여 몬덱스코리아, 비자캐시코리아, A캐시, 마이비 등 전자화폐 업체들이 출현하면서 본격적으로 사업이 추진됐다.

국내 전자화폐업체들은 업체들마다 다양한 설립 배경을 갖고 있었다. 2000년 6월 설립된 비자캐시코리아는 SK텔레콤과 삼성물산이 대주주로 자본금은 약 161억 원이었다. 외국계 회사인 몬덱스코리아는 1998년 12월에 마스터카드인터내셔날, 국민은행, KIS정보통신의 공동출자로 설립됐다. 국내 업체로는 A캐시가 삼성, LG, 국민카드 3사로부터 100억 원의 자본금을 출자해 2000년 7월 사업을 시작했다. K캐시는 금융감독원 주도로 11개 은행의 연합체로 구성됐다. 마이비는 2000년 9월에 롯데그룹과 부산은행을 중심으로 부산 지역회사들이 모여 72억 원의 자본금으로 설립됐다.

이러한 각 사의 설립 배경은 사업 방향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국내 전자화폐 업계 현황(출처: 컴퓨터월드, 2002년 4월호)
국내 전자화폐 업계 현황(출처: 컴퓨터월드, 2002년 4월호)

지역별 사업권 확보 나서

전자화폐 업체들은 각자 지역을 기반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A캐시는 경기도와 원주시를 중심으로 교통과 관련한 가맹점을 확보했다. 수원시에서 운행 중인 4천 대의 버스 중 1,500대에 A캐시 단말기를 설치한데 이어 원주에 200여 대, 춘천에 200여 대 등 단말기를 설치했다.

비자캐시코리아는 엘지카드, 외환카드, 삼성카드, 하나은행, 한미은행과의 제휴를 통해 신용카드와 전자화폐 기능을 가진 모네타 카드를 출시하고 전국 체인을 중심으로 서비스를 제공했다. 초기에 서울 경기 지역의 롯데리아 전 매장, 세븐일레븐(본점) 등을 중심으로 서비스를 실시했으며, 스타벅스와 같은 프랜차이즈를 중심으로 가맹점을 확보해 나갔다. 또한 SK텔레콤의 멤버십 서비스인 TTL 가맹점 전체가 비자캐시의 가맹점으로 등록돼 있어 어디서든지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몬덱스코리아는 2000년 6월부터 트레이드패스카드라는 상품명으로 코엑스와 역삼역 일대에서 시범서비스를 시작했다. 이후 PC방용 전자화폐 사업을 개시했으며, 월드콜 콜택시에 결제시스템을 공급해 전자화폐를 이용한 택시 서비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마이비는 부산지역을 중심으로 교통 및 유통 분야에서 확고하게 기반을 마련했다. 부산시내버스 및 마을버스 그리고 지하철 전 구간에서 사용이 가능했으며, 주요 민자 터널 및 유료도로에서도 사용하는 등 교통 전 영역에 있어 서비스를 제공했다. 유통 분야에서도 부산 시내 음식점, PC방, 패스트푸드점 등 6천여 개의 가맹점을 확보했다.


업체별 특성화 통해 생존 방안 모색

다양한 전자화폐와 카드가 보급되면서 과잉 중복 투자에 대한 우려도 제기됐다. 과거 가맹점마다 사용할 수 있는 신용카드가 따로 있어 불편했던 것처럼 전자화폐 또한 그런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인프라의 표준화가 시급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2001년부터 표준단말기에 대한 논의가 진행됐고 표준도 확정돼 하반기에 적용될 예정이었다.

통합단말기가 도입될 경우 그동안 유지돼 왔던 업체별 지역별 특성 등이 모두 사라지고 모든 지역 모든 업종에서 무한 경쟁을 해야만 했다. 업체들은 이러한 상황이 오기 전에 최대한 점유율을 높여야 한다는 절박감에 시장 공략에 박차를 가했다.

A캐시는 주로 학생층을 대상으로 교통 기능을 가진 전자화폐 보급에 주력했다. 이를 위해 카드를 기존 버스카드처럼 무기명 카드 방식으로 공급했다. 처음 카드를 받아 사용한 후, 카드번호를 인터넷에 등록해 충전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런 방식으로 기존 카드 신청서 접수 및 처리에서 들어가는 비용을 크게 절약할 수 있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동으로 성인 회원으로 인증이 되는 등 잠재 고객을 확보하는 효과도 얻었다.

비자캐시코리아는 제휴 카드를 통한 사업 확장을 꾀했다. 비자캐시코리아의 가장 큰 장점은 SK텔레콤이라는 거대 사업자와의 제휴를 통한 카드 발급이었다. 기존 SK이용자들을 위한 TTL 카드는 물론 SK텔레콤과 5개 은행이 제휴한 모네타 카드는 두 달 만에 40만 명의 가입자를 유치하는 등 다른 경쟁사보다 많은 고객을 확보할 수 있었다. 2002년 말까지 330만 장의 카드를 발급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카드 발급량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가맹점을 확보하기가 쉬워지고, 이는 다시 카드 발급량을 늘리게 되는 선순환이 예상됐다.

몬덱스코리아는 유통 분야 가맹점 확보와 제휴카드 확대에 중점을 뒀다. 몬덱스코리아가 발급한 KTF 멤버스 카드의 제휴사를 기존의 삼성카드에서 비씨카드와 국민카드까지 확대했으며, 국민은행, 조흥은행, 농협중앙회, LG카드 등 다른 회사와도 협약해 몬덱스코리아의 트레이드패스, 경기머니, 제주관광, 몬덱스프리패스 같은 다양한 카드 상품을 공급했다.

마이비는 탄탄한 교통 인프라를 기반으로 부산지역에 전자화폐 100만 장을 보급할 계획이었다. 특히 지하철 이용자 흡수, 무기명 카드 자판기 도입, 연내 1만 5천 개의 가맹점 모집 등 부산지역 어디서든 불편함 없이 카드를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나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또한 월드컵 기간 중 전국 단위 매체 홍보를 통해 지역에서 전국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해나간다는 방침이었다.


공무원 스마트신분증 등 정부지원도 이어져

전자화폐 활성화에 정부도 적극 나섰다. 정부는 조달용 PC에 권고사항으로 표준형 카드 단말기를 설치하도록 하고, 공무원신분증 스마트 카드화 사업에 전자화폐기능을 추가했다. 또한 전자화폐 가맹점에 한해 전자화폐 결제분에 대한 부가가치세를 면제해 주는 등의 지원방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업계는 실제 사용자들을 위한 지원이 없다는 이유를 들어 불만의 목소리를 냈다. 특히 신용카드에 적용되고 있는 세금 공제혜택만이라도 전자화폐에 제공해 줄 것을 요구했다.

한편 서울이나 중앙정부보다는 지방자치단체에서 전자화폐 도입이 늘어나는 추세였다. 부산광역시는 이미 마이비를 통해 시 전역에 전자화폐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광주, 인천, 춘천, 수원, 원주, 대전 등에서도 전자화폐 도입을 추진하고 있었다.

지방자치 단체가 추진하는 전자화폐사업은 전국 시장 진입을 앞둔 전초전 성격을 지녀 업체들의 경쟁이 치열했다. 일단 지역사업자로 선정되면 그 지역에서 만큼은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향후 전국적인 공동시장이 열리더라도 충분히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있었다. 업체들이 초기 인프라 투자비용에 대한 부담을 감수하면서도 지방자치단체 사업자로 선정되기 위해 노력했던 이유였다.

당시 시장의 가장 큰 변수는 표준단말기 보급과 서울 교통카드 시장 개방이었다. 표준단말기가 전국에 배포될 경우 전자화폐를 종류에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업체의 인지도가 가입자 신규 확보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또한 서울시에서 전자화폐를 도입할 경우 경기와 인천 지역에서도 전자화폐를 사용할 수 있어 큰 시장이 형성될 것으로 예상됐다. 업계는 표준단말기 보급과 서울 교통카드 도입이 얼마나 빨리 이뤄지냐가 전자화폐 사업의 성패를 좌우할 것으로 봤다.

해외에서도 제대로 활성화된 적 없는 전자화폐가 국내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많았지만, 국내 시장에서는 낙관론이 우세했다. 업계에서는 개인 소비자들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는 이동통신사와 카드사가 전자화폐를 함께 준비하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어느 정도 성공을 자신하고 있었다.

이처럼 2002년은 2년여의 준비기간을 끝내고 전자화폐 시장이 본격적으로 사업을 펼치기 시작한 해로 기록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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